인생 최고 시절에 다정했더라면...인생 덜 추해졌을까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1. 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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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07] 영화 ‘타르’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케이트 블란쳇에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타르’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다정하지 않은 주인공 타르를 등장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삶에 왜 다정함이 필요한지 말한다. 우리가 최소한의 다정함을 갖춰야 하는 건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차원만은 아니다. 언젠가 세상의 무자비한 시선에 노출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타르’의 타이틀롤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남을 압도할 듯 달려들다가 순식간에 세상에 압도당해버리는 주인공 심리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몰래카메라에 시달리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
내용을 살펴보자. 리디아 타르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여성 수석 지휘자다. 전술했듯 타르는 다정함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남에게 다정하거나 친절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곡가이기도 한 타르는 다재다능하고, 심지가 곧으며, 언변이 화려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이 주변에 넘친다. 굳이 착하게 굴지 않아도 남들이 다 잘해준다. 자신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기회라고 여기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타르는 남을 굳이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타르의 주변엔 그를 우러러 보는 여성들이 있다. 그 감정은 때로 존경과 사랑 사이를 넘나든다. 타르는 자기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감정 상태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관객의 감상도 크게 바뀔 것이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타르의 주변엔 그를 섬기는 여성 음악가들도 있다. 그들의 감정은 때때로 존경을 넘어 사랑과 소유욕으로 발전하는 듯하다. 타르를 가까운 거리에서 몰래 찍어 담는 스마트폰 카메라의 움직임이 이를 보여준다. 타르를 관음의 대상으로 삼는 카메라의 시선은 때로 그녀를 모욕하는 듯 느껴진다. 타르의 영상 위로 스마트폰 소유자와 익명의 상대방이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녀를 능멸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전달된다.
타르는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타르가 집중할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접근하기 어렵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아마도 그녀들은 타르에게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던 듯하다. 자신들의 헌신에 대해 응당 돌려받았어야 할(돌려받을 것으로 믿었던) 대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익명성 속에 숨어서 타르를 험담하지만, 타르를 향한 그들의 멸시는 온전히 증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외려 ‘내게도 사랑을 돌려달라’ ‘내게 마땅한 몫을 달라’고 그녀가 없는 곳에서라도 호소하는 것인지 모른다.
답을 모르겠을 때 타르는 달린다. 멈춰 있는 것이 죄악이라도 된다는 듯 계속 움직인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영화 초반부엔 타르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강연 도중 타르는 “바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학생과 맞선다. 바흐가 여성혐오적이어서 존중할 수 없다는 학생에게 타르는 음악가는 작업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타르는 이 과정에서 학생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으며, 보기에 따라 그의 인종을 차별하는 듯한 발언까지 나아간다. ‘너 역시도 정체성에 약점이 있는데, 타인의 정체성을 갖고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돌려 하는 것이다. 학생은 모욕감을 느끼고, 그녀의 강의실에서 나가버린다.
타르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를 살아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게 하는 건 온전히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누구나 보는 각도에 따라 아주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독은 날카롭게 포착한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음악의 신 같았던 그녀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다
다소 정적으로 전개되던 극은 중반부터 가파르게 치달린다. 타르를 가까운 거리에서 봤던 지휘자 지망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다. 그녀는 자기 죽음의 원인으로 타르를 지목했고, 그건 타르를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놓는다. 남을 판단하고 선택하던 그녀는 이제 타인에게 판단 받는 입장이 된다. 음악 실력이 아닌 그녀가 저질렀을지도 모를 죄 때문에, 타르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무대에 서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격정적인 타르의 지휘. [이미지 제공=UPI코리아]
관객은 타르가 줄곧 ‘음악가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타르가 자신이 말해오던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음악은 정치나 인간관계의 개입 없이 순결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 타르의 주장이었다. 그녀는 오케스트라에서 중책을 맡을 인물을 고를 때도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했다. 악단에 얼마나 긴 세월 헌신했는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실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단원의 헌신과 관계없이 내쳤다.
타르의 눈에 들어온 첼리스트. 타르는 아마도 젊은 재능이 발산하는 에너지에 자주 매혹됐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카메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타르를 비추며 그녀의 주장이 기만이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사실 타르가 세계적 지휘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악용해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샀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타르의 평상시 모습이 담긴 고발 영상에는 그녀가 어린 음악가에게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하는 장면이 포착된다. 성추행으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선생과 제자 사이에 필수 불가결한 스킨십도 아니다. 하나의 장면만으로 ‘그녀는 유죄’라고 고발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그녀는 책 잡을 데 없이 무결하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려운 근거로 보인다.
감독은 처음부터 케이트 블란쳇만을 떠올리며 각본을 썼다고 한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또한 그녀의 파트너는 지금과는 다른 타르의 과거를 회상한다. 처음 타르가 객원 지휘자로서 악단에 왔을 때, 자기에게 조언을 구하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다. 악단의 영구적 멤버가 되기를 원했던 타르는 해당 집단 내에서 정치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물었고, 도움을 요청했다. 마치 자신은 정치나 인간관계에서 동떨어져 지낼 수 있는 것처럼 굴었지만, 본인 또한 집단의 역학 관계를 필요에 따라 활용해왔던 것이다.
간접조명만으로 밝힌 타르의 집이 차분하게 느껴진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평상시에 다정함을 적립해두지 않으면
영화는 한 사람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완전무결한 절대자처럼 굴었던 타르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만 연주해달라는 이웃의 요청에 평정심을 잃어버린다. 온갖 소음을 발산하며 이웃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세상으로부터 질타받으며 가뜩이나 나약해져 있는 가운데, 자기 음악을 소음으로 규정한 이웃에게 폭발해버린 것이다. 그녀의 세계적 명성을 모르는 이웃의 눈에 타르는 분노조절을 못하는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녀 또한 양면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사진 제공=UPI코리아]
물론 타르를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그녀는 모든 이가 그렇듯 양면성을 지닌 인간이었을 뿐이다. 문제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풀리고 있을 때, 최소한의 다정함을 주위에 심어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녀에게 조금의 온정이나 용서를 기대했던 모든 이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러한 연유로 타르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다정함을 바랄 수 있는 구석이 어느 한 곳도 없었다.

‘타르’는 우리가 평상시에 다정함을 조금씩 적립해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영화로 읽을 수 있다. 남의 온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때에 주변에 다정함을 베풀어둬야만, 타인의 온기가 아주 많이 필요한 시기에 조금이라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타르’ 포스터. [사진 제공=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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