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의 와인클럽] "당신 눈동자에 건배" 외치던 샴페인, 설탕과의 전쟁 시작
"샴페인을 만들 때 설탕을 넣는다고요?"
최근 정부가 샴페인 등 스파클링 와인의 라벨에 '설탕 첨가' 여부를 표기했는지 검사하겠다고 밝히면서 와인 소비자들은 어리둥절한 반응이다. 대다수 소비자가 샴페인 제조에 인위적으로 설탕(당)을 넣는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샴페인에는 브뤼(Brut), 드미섹(Demi-Sec) 등 당도가 표기돼 있지만 이는 포도의 당분이라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다. 동시에 와인 수입 업계에선 정부의 과도한 행정조치라며 불만도 나오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올해부터 샴페인을 포함한 스파클링 와인을 수입할 때 '설탕'이 원재료에 표시돼 있는지를 검사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이 "샴페인 제조 과정에서 설탕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원재료명에 설탕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최 의원은 631개 제품을 조사한 결과 613개 제품이 설탕 첨가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샴페인에는 왜 설탕을 넣는 것일까. 샴페인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나폴레옹 이전엔 매춘부나 마시는 술 취급
"샴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 마실 자격이 있기 때문에, 패배하면 필요하니까 마신다."
샴페인을 사랑한 나폴레옹의 어록으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의 최정예 경기병 부대는 칼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브라주(Sabrage)를 즐기며 유럽의 전장에서 승리를 축하했다. 그러나 샴페인이 처음부터 소비자의 사랑을 받았던 건 아니다.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인 1700년대만 해도 프랑스 소비자들은 샴페인을 마시는 건 품위 없는 행동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매춘부'나 마시는 술로 평가할 정도였다. 바로 샴페인의 '기포'가 문제였다. 와인의 기포는 큰 '결점'으로 여겨졌다. 와인에서 왜 기포가 생기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악마의 와인'으로 불렸다. 그 비밀을 풀어낸 건 영국인이었다.
영국의 과학자 크리스토퍼 메렛은 1662년 와인 속 당분이 기포를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리고 설탕(당분)을 넣으면 어떤 와인이건 스파클링 와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포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샴페인에 설탕을 넣은 건 아니었다.
1660년대 영국에선 프랑스 샹파뉴의 와인을 수입했다. 기포가 있는 스파클링이 아닌 일반 레드 와인이었다. 겨울철 런던 부두로 옮겨진 샹파뉴의 레드 와인은 봄만 되면 탄산 버블이 생겨 스파클링 와인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즙이 술(와인)로 변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포도에 붙어 있던 효모는 포도의 당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탄산)로 변화시킨다. 발효 중 생긴 탄산가스는 공기 중으로 날아가 일반 와인은 큰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샹파뉴에서 생산한 와인에 유독 기포가 생겼던 이유는 겨울 추위 때문이었다. 샹파뉴는 파리 북동쪽,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다. 위도상 '만주'랑 비슷하다. 북반구에서 포도를 생산할 수 있는 가장 추운 지역에 속한다. 샹파뉴의 추운 겨울 동안 효모는 활동을 중단하고 발효도 함께 중단됐다. 이를 모르던 와인 생산자들은 발효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와인을 병에 옮겨 담았다. 봄이 돼 효모가 겨울잠에서 깨어 다시 활동하면서 와인 병에 버블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와인의 결점이었던 '기포'를 상품화
탄산이 가득 찬 샴페인 병 안의 압력은 5~6기압에 달한다. 과거 프랑스의 샴페인 병은 재질이 약해 '펑펑' 잘 터졌다. 와인 저장고에서 샴페인을 꺼내려면 언제 샴페인 병이 터질지 몰라 철가면을 얼굴에 쓰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이를 해결한 게 영국의 '석탄'이다.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1621년 장작 화로의 사용을 금지한다. 영국 해군의 전선을 만들 나무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장작 대신 석탄불로 유리병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고온에서 만든 유리병은 더 튼튼해 샴페인의 높은 압력을 견딜 수 있었다. 와인 기포의 비밀이 풀리고 터지지 않는 와인 병이 등장하며 프랑스보다 먼저 영국에서 스파클링 샴페인의 소비가 활성화됐다.
유명 샴페인하우스인 '태탕저'의 관계자는 과거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인은 자신이 샴페인의 발명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샴페인이 아닌 '샴페인 소비'의 발명자다. 그들이 와인의 반짝임(스파클링)을 먼저 감상한 공로는 인정한다"고 말했다.
경쟁력 없는 적포도로 화이트 와인 생산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손석구가 던진 명대사는 원래 영화 '카사블랑카'의 대사다. 남자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가 샴페인을 마시며 잉그리드 버그먼을 향해 "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건배사를 외치는 데 직역보다도 더 적절한 의역이 가슴을 적신다.
1693년 샴페인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돔 페리뇽 수도사의 이야기도 상당 부분 후세에 꾸며낸 것이다. 샴페인을 마시며 "나는 지금 별을 마시고 있다"고 말한 사람도 돔 페리뇽 수도사가 아니다. 하지만 돔 페리뇽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는 붉은색의 레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을 수도 있다.
과거 샹파뉴는 레드 와인 생산지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청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지나치게 시큼했다. 적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도 맛이 좋지 않았다. 다만 적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 비교적 품질을 인정받았다.
와인의 색은 포도껍질의 색이 결정한다. 레드 와인은 적포도로, 화이트 와인은 청포도로 만든다. 하지만 포도즙을 발효시켜 와인을 만들 때 포도껍질 접촉을 최소화하면 적포도로도 화이트 와인을 만들 수 있었다. 적포도도 포도즙은 투명하기 때문이다. 수도사 돔 페리뇽은 적포도 품종인 피노 누아 신봉자였다. 그는 적포도로 깨끗한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샹파뉴의 레드 와인이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인 샴페인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샴페인과 일반 와인의 제조법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2차 발효'에 있다. 일반 와인은 오크통이나 스테인리스 스틸통에서 1차 발효를 거쳐 출시된다. 샴페인은 1차 발효를 마친 스틸 와인에 설탕 등이 섞인 용액을 넣어 다시 2차 발효시킨다. 이때는 와인을 병에 담고 마개로 틀어막아 탄산을 가둔다.
1·2차 발효를 거친 샴페인은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르미아주(Remuage), 제거한 만큼 다시 양을 보충해주는 도자주(Dosage) 등 여러 단계의 생산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 '전통 방식' 또는 '샴페인 방식'이라고 부른다.
샴페인 제조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설탕을 넣는 것은 2차 발효와 도자주 때이다. 2차 발효를 통해 샴페인은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고 탄산이 생기는데, ℓ당 설탕 4g이 1기압의 탄산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6기압을 맞추려면 이론상 ℓ당 24g의 설탕이 들어가야 한다. 2차 발효에 넣은 설탕은 발효과정에서 모두 알코올과 탄산으로 바뀌기 때문에 샴페인에 남아 있지 않다. 도자주 때는 당과 와인 등을 섞은 '리큐어 덱스페디시옹'이라는 액체를 추가하는데 이때 추가된 당분의 양이 샴페인의 최종 당도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샴페인은 처음에는 디저트 와인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도자주에 들어가는 설탕 함유량이 많았다. 하지만 영국의 상류층 소비자들은 달지 않은 샴페인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프랑스 샴페인 제조업체들은 브뤼 샴페인을 만든다. '드라이'한 브뤼 샴페인에는 ℓ당 0~12g의 설탕이 들어간다.
샴페인에 설탕을 넣는 이유
그러면 왜 지금도 샴페인에 설탕을 왜 넣을까.
샴페인 전문가인 피터 리암은 그의 책 '샴페인'에서 "당도가 아닌 샴페인의 전체적인 조화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음식을 짜게 하려고 소금을 넣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풍미를 좋게 하려고 소금을 넣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실제 도자주에 들어간 설탕의 양이 단맛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와인의 산도가 높으면 설탕이 많이 들어가도 단맛이 감춰질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콜라의 경우 산도(pH)가 식초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보통 콜라를 시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기후 온난화로 샹파뉴에서 생산되는 포도도 과거에 비해 '신맛'보다는 '단맛'이 강해지고 있다. 따라서 도자주에 들어가는 설탕의 양도 점점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 많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2월 8일부터 샴페인을 포함한 스파클링 와인 라벨에 설탕 첨가 표기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한국을 방문한 유럽의 한 와인 업계 관계자는 설탕 첨가 표기 의무화를 '설탕과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설탕세의 타깃이 된 탄산음료 업계가 스파클링 와인을 전선에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설탕이 들어간 탄산음료가 비만과 당뇨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에 따라 영국은 이미 탄산음료에 설탕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미국도 주별로 설탕세를 도입하고 있다. 국내 식품 업계도 이번 식약처의 조치를 주목하고 있다. 다만 식약처의 이번 조치가 지나치게 행정 편의적이란 시각도 있다. 예를 들어 EU 가이드라인은 지난해 12월 8일 이후 제조된 와인에만 해당한다. 하지만 한국은 과거에 이미 제조된 와인이라도 1월 1일 이후 선적된 와인은 모두 적용 대상이란 점에서 혼란이 예상된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샴페인
샴페인은 탄생이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샴페인의 역사는 수많은 악조건에 대응한 '응전'의 역사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와인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지만 유독 샴페인을 포함한 스파클링 와인 소비는 늘고 있다. 샴페인은 이제 '설탕과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샴페인은 와인의 결점으로 여겨졌던 기포를 특화해 상품화시켰고, 시큼한 포도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조공법은 꾸준히 진화해왔다. 각 시대의 첨단 과학기술을 적용했고, 새로운 지식을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비자의 기호 변화를 민감하게 수용하면서도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하며 브랜드를 명품의 반열에 끌어올렸다. 샴페인이란 상품의 탄생과 생존 전략은 현대 경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해 경영을 구상 중인 최고경영자(CEO)들은 오늘 저녁이라도 샴페인을 한잔 마시며 차분히 샴페인의 성장사를 탐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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