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걸작품이 된 상처

한겨레 2024. 1. 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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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무제’, 2014, 철판에 녹, 71.3×71.3㎝, 사진: 임장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정현: 덩어리’전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출근길에 좁은 지하 주차장에서 성급히 회전하려다가 기둥에 내 차 뒷좌석 문을 긁었다. 속상했지만 별것 아니다 싶어서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퇴근하면서 주차된 차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데, 애써 외면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길게 패인 흠집으로 시선이 쏠림과 동시에, 사고 순간에 뭔 잡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산만했는지, 잠이 덜 깨어 감각이 둔했는지, 아니면 요즘 들어 실수와 실언이 잦았는데 그 연속이었는지, 끊임없이 원인을 캐며 나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차의 흠집을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이런 생각이 따라온다면 하루가 시작부터 불행해지겠구나 싶어서 당장 수리를 맡겼다. 도색을 마친 자동차는 다시 매끈해져 돌아왔다. 상처 자국을 제거하면 아픈 기억도 함께 지워지는 모양인지, 더 이상 나는 그날의 사고를 떠올리지 않게 됐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조각가 정현의 전시회에 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무의식의 작동이었을까? 정현의 미술 세계를 대표하는 덩어리들 사이로 평면 작품 하나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철판을 날카로운 도구로 긁은 후 그 흠집에 녹이 슬도록 비 오는 야외에서 방치한, 일명 녹드로잉이다.

정현은 녹드로잉을 위해 철판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내는데, 때로는 차에 철판을 매달고 자갈길 위에서 끌고 다니는가 하면, 직접 채찍으로 후려쳐서 자국을 내기도 한다. 마치 피부에 상처가 나면 피와 진물이 나오고 딱지가 생기는 것처럼, 철판에도 상처 부위에만 녹이 붙어 빗물에 의해 녹물로 흘러나온다. “나는 흠집만 냈을 뿐 자연과 시간이 그려준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녹의 흔적이 작품으로 완성되는 데에는 길게는 5~6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정현의 작품을 보면 한낱 재료에 불과할지라도 처절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철판에 감정이입이 된다고 할까. 쓰라린 고통을 견뎌내야 했고, 비바람도 피하지 못한 채 상처가 곪아 터져 결국 몸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더는 아프지 않고, 덤덤하게 자신의 상흔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어느 인생사가 작품에 교차 되는 것이다.

상처와 고통이 어떻게 미적 관조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미학에서는 ‘숭고(sublime)’라는 개념으로 이를 풀어낸다. 가령 예쁜 얼굴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유쾌한 첫인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예쁘지 않아도 강렬하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미의 영역과 대조를 이루는 숭고의 영역이다. 숭고한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도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음미하려면 어느 정도 집중과 긴장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숭고한 대상은 규모가 거대하고 질감이 거칠며, 어둡고 육중하다. 반면 아름다운 대상은 비교적 섬세하고 매끄러우며 환한 편이다.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를 쓴 18세기 영국의 인문학자, 에드먼드 버크에 의하면, 숭고는 고통에, 미는 쾌(快)에 기초한 본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통과 쾌는 우리의 경험 속에서 분리되기도 하지만, 서로 연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인 유안진은 ‘상처가 더 꽃이다’라는 시에서 사백 년 묵은 매화 고목을 그 꽃과 비교하며 예찬한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중략)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여기서 상처의 꽃이 바로 고통과 쾌의 만남 아니겠는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나이를 먹을 수는 없다. 삶이란 게, 시간을 거치면서, 결코 실수나 실패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축적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구구절절 힘든 사연을 줄곧 상기할 필요도 없고, 다시 마주칠 일 없을 타인에게 첫인상으로 전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가볍게 인사 나누는 사이에서 누군가 처참한 얼굴로 나타난다면 충격을 줄 뿐이다. 자신의 기분을 돌보기 위해서 혹은 상대를 배려해서라도 도시의 사회인들은 상흔을 빨리 제거하고 기분 좋은 인상으로 위장하며 산다. 그런 사람들이 정현의 작품 앞에서 지금의 자신을 반추하다가 불현듯 숭고의 경지를 보게 된다. 평범하던 철판이 상처투성이 그대로 마침내 꽃까지 피워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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