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神이 되고 守神이 되고…권력의 상징이었던 그 존재, 용

지유리 기자 2024. 1. 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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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해, 용을 찾아서] 농업·농촌 문화 속 용의 의미
선조들, 못에서 태어난 용이 승천해
비 내리고 물과 바다 다스린다 믿어
유둣날엔 풍년 기원하는 용신제 지내
마을 안녕 위해 지명에 ‘용’자 넣기도
용안·용상·곤룡포·용비어천가 등
왕과 관련돼 권위 드러내기 적합
쌍룡놀이·용마놀이 등도 전해져
현대에는 청룡열차 타며 스릴 만끽
갑진년, ‘용’ 찾아 길한 기운 충전
매년 10월경 전북 김제지평선축제에서 민속놀이인 ‘쌍룡놀이’가 재현된다. 마을사람들이 각각 청룡과 백룡으로 나눠 힘을 겨루는 놀이다.

머리는 낙타요, 목덜미는 뱀이로다. 뿔은 사슴이고,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를 닮은 것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용을 떠올려보자.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용의 생김새를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물의 신이자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용은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존재했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는 농촌에선 우물이나 샘터를 찾아 비손한다. 물에 사는 용에게 제를 올린다고 해 ‘용왕제’로도 부른다. 사진은 충남 청양의 우물제.

◆풍년을 가져다주는 수신(水神)=농사는 물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가물어도, 반대로 홍수가 나도 농사를 망치게 된다. 물은 용과도 밀접하다. 선조들은 못에서 태어난 용이 승천해 비를 내리며 물과 바다를 다스리는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용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미르’는 ‘물’과 어원이 같다. 용은 곧 수신이었다.

풍년은 물에 좌우됐으니, 농경시대 용은 최고의 신으로 여겨진 것이 당연하다. 농신으로서 용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유둣날(음력 6월15일)이다. 이날 농가는 그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밀가루떡을 장만해 논의 물꼬 근처나 밭 등지에 차려두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용신제’라고 한다. 유둣날 고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당대 풍속을 기록한 책 ‘동국세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6년 충남 서산에서 제작·사용된 농기. 물을 관장하는 용과 잉어가 그려져 있다.
물을 퍼 올리는 농기구인 용두레. 이름에 물을 관장하는 ‘용’이 붙었다.

농기구 이름 가운데 용이 붙은 것도 있다. 논밭에 물을 퍼 옮기는 용두레다. 지름이 족히 1m에 이르는 통나무를 앞쪽은 넓고 깊게, 뒤쪽은 좁고 얇게 파낸 다음 바가지처럼 쓴다. 워낙 크고 무거워 삼각대처럼 지지대를 세우고 매달아 사용했다. 한번에 물 30∼40ℓ를 옮겼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정조가 수원화성을 지을 때도 용두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과거 마을 대동제나 두레 같은 행사를 할 때면 마을마다 지역을 상징하는 농기(農旗)를 걸었다. 농기엔 마을 이름이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같은 글씨를 쓰고 동물을 그렸다. 가장 많이 그려진 동물이 바로 용이다. 1946년 제작된 충남 서산군(현 서산시) 고북면 장선리 농기에는 청룡과 잉어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벼농사를 업으로 삼은 마을이다보니 물과 관련한 것을 상징으로 내세운 듯하다. 전라지역 농기에도 청룡이 자주 등장한다. 김형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때 용은 왕의 상징이었지만, 조선 후기 왕권이 약해지면서 일반 사람들도 자신을 용과 비유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뿐일까. 마을의 안녕을 위해 아예 지명에 ‘용’자를 넣는 사례는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허다하다. 서울 용산, 경북 포항 구룡포, 제주 용두암 등은 용의 기운을 얻고자 이름 붙여졌다. 그곳이 강이나 바위라면 열에 아홉은 기우제나 고사를 지내던 곳이다. 자연에 기대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용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수호신이었을 터다. 2021년 국토지리정보원 통계에 따르면 전국 고시 지명 약 10만개 가운데 십이지를 본뜬 지명은 4109개이고, 이 중 용과 관련한 것이 1261개로 가장 많다.

경북 포항 구룡포는 용 아홉마리가 승천한 곳이라는 설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과거엔 풍년·풍어가 들면 구룡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사진은 경북 포항 구룡포에 세워진 ‘용의 승천-새빛 구룡포’라는 이름의 조형물이다.

◆일상 속 친근한 용=용안·용상·용비·곤룡포·용비어천가 등은 모두 왕에 관련된 말이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에 용이 적합하다는 의미다. 신성한 용은 권력의 상징이다. 그중 곤룡포는 임금이 입는 옷을 뜻하며, 가슴과 어깨 부분에 용이 수놓아져 있다. 궁궐 지붕의 한가운데인 용마루를 치장하는 장식기와에서도 권위를 가늠할 수 있다. 용마루에서 양쪽 끝으로 이어지는 곳에 소룡(小龍)을 새기거나 용머리 모양의 장식기와인 ‘용두’를 얹어 왕권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용이 늘 높고 먼 존재만은 아니었다. 일년에 한두번 온 이웃이 모이면 스스로 용이 돼 용맹함을 겨루는 놀이 한판을 벌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인 전북 김제 벽골제에는 민속놀이인 쌍룡놀이가 전해진다. 제방을 수호하는 백룡과 비바람을 일으키는 청룡이 자주 싸우자 김제 태수 외동딸인 단야가 목숨을 바쳐 싸움을 끝냈다는 설화에서 기인한 놀이다. 마을 사람들이 각각 백룡·청룡이 돼 놀게 되는데, 지금은 ‘김제지평선축제’에서 이뤄지는 행사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전북 남원에선 섣달그믐이나 정월 대보름이 되면 풍흉을 점치고자 편을 나눠 승부를 가르는 대동놀이를 했다. 이 놀이를 용마놀이라고 한다. 백제시대부터 지금껏 이어져 오는 민속놀이다.

관람객이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에 조성된 청룡열차에 탔다. 스크린 속 영상에서는 청룡열차를 타고 스릴을 만끽하는 1990년대 사람들이 보인다.

현대에도 용은 놀이에 자주 소환된다. 한때 소풍 일번지였던 놀이동산의 대표 놀이기구는 다름 아닌 ‘청룡열차’였다. 맨 앞칸에 용의 얼굴이 장식된 기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레일 위를 달리며 스릴을 만끽한다. 국내 프로야구 원년 구단 중 ‘MBC 청룡’이 있었다. 용맹함과 친숙함을 모두 표현하기에 용만 한 것이 없다.

푸른 용의 해, 갑진년이다. 우리 전통문화 속 용을 보며 길하고 신묘한 기운을 느껴보자.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새해를 맞아 3월3일까지 ‘용, 날아오르다’ 기획전이 열린다. 한번쯤 방문해 우리 문화 속의 용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지유리 기자 국립민속박물관, 포항시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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