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강간살인 용의자 때려죽인 ‘선량한 시민들’…진범은 따로 있었다 [사색(史色)]
[사색-52] 음습한 공장 지하 사무실. 여느 때처럼 공장 관리인이 새벽 순찰을 돌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묵직한 침묵 속. 그날따라 공기는 더욱 무거웠다. 어딘가에서 피비린내만이 코끝을 스쳤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손전등 빛이 닿은 건 조그만 시신. 13살의 여자, 이 공장에서 일했던 메리 패건이었다. 속옷은 벗겨진 채 목에 띠가 감겨 있었다. 살인이었다. 얼굴에 멍든 자국은 그녀가 끔찍하게 살해당했음을 증명했다.
리오 프랭크는 살인 사건 발생 직후 말을 더듬으며 당황해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명문 코넬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하던 그가 살인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진 뒤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짐 콘리가 아주 말쑥하고 신뢰있는 차림새로 나타나 리오 프랭크의 범행을 일목요연하게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변태적 성욕이 있었다”, “수 많은 여직원을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의 탁자에 소녀들이 나체로 누워있었다”는 둥 구체적 묘사도 쏟아냈다. 재판 마지막에는 리오 프랭크가 메리 패건을 죽였고, 자신에게 그 시체 처리를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의 방청객 모두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갸롯 유다도 예수를 배반하기 전까지 친척,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리오 프랭크가 이웃을 웃으며 대하면서 동시에 사무실에서 어떻게 소녀들을 성적으로 짓밟았는지를 자극적으로 묘사했다. 성추행이나, 살인이나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이미 리오 프랭크를 살인자이자 성도착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언론은 일찌감치 리오 프랭크를 범인으로 낙인찍었다. 재판 직후부터 애틀랜타 지역 3대 일간지인 컨스티튜션, 저널, 조지안은 한 시간에 하나씩 호외를 발행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메리 페건의 시체가 얼마나 잔혹하게 훼손됐는지를 묘사했다. 리오 프랭크가 전처를 살해한 적이 있다거나, 혼외자식이 여럿이라는 둥 기괴한 소문은 ‘데스킹’이라는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지면에 실렸다.
이제 리오 프랭크는 애틀랜타, 조지아주의 공공의 적이었다. 저널리즘의 죽음이었다. 저명한 미국의 언론인 스티브 오니는 2004년 이 사건을 다시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보도 윤리 측면에서 프랭크 사례만큼 최악인 건 찾기 어렵다.”
1913년 8월 리오 프랭크의 유죄가 확정됐다. 사형이었다. 짐 콘리는 리오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고작 1년 형을 받았다. 애틀랜타는 그야말로 축제의 도가니었다. 모든 지역민들이 리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를 바랐다. 한 사람을 향한 저주가 이렇게까지 거센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 분노에는 사회적인 맥락이 존재해서다. 북부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가난한 남부 농민들의 ‘박탈감’이었다.
오늘날 유대인은 미국의 대표적 상류계층으로 여겨지지만, 처음에는 멸시받는 존재였다.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제2차 이민 물결로 동유럽 출신 유대인이 미국 남부로 대거 유입되면서 반유대인정서가 빠르게 확산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 특유의 민족성으로 상업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이들을 향한 혐오 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새로운 ‘하얀 깜둥이’(white niggers)로 불렸을 정도였다. 인류학자 카렌 프로드킨은 “미국 유대계 이민자들은 ‘미흡한 백인(not quite white)’으로 취급받았다”고 했다.
리오 프랭크가 겁탈한 건 이제 메리 페건만이 아니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남부의 시민을, 순결하고 정직한 백인을 강간한 것이었다. 이 케이스를 미국의 인종주의와 섹슈얼리티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유대주의를 피해 유럽에서 도망쳤는데, 또 다시 유대인 학대와 마주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이유에서였다. 반유대 정서가 확대되는 것을 조기에 막아야 했다. 그 첫발이 리오 프랭크 구명이었다. 미국 전역의 유대인들이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 뉴욕타임스의 발행인 아돌프 옥스도 그중 하나였다. 2년 동안의 항소로 사형 집행은 다행히 연기될 수 있었다.
구명 운동은 조지아 주에서만큼은 역효과였다. 반(反)프랭크 운동이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19세기 말 미국 인민당 지도자로 활약한 톰 왓슨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거리의 시민에게, 언론에, 정치인들에게 말했다. “리오 프랭크를 옹호하는 북부 신문들은 모두 유대인 소유다. 서둘러 프랭크의 교수형을 집행하라.”
백인 하층계급(crackers)은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이견 없이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혐오를 퍼뜨리는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 가난한 백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아 시민들이 피의 복수를 다짐했기 때문이다. ‘메리 페건 기사단’이었다. 법이 리오 프랭크를 용서한다면, 정의로운 시민들이 복수를 대신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정의 실현의 날’은 1915년 8월 16일이었다. 오후 10시에 그들은 차량 8대로 교도소를 급습했다. 교도소는 쉽게 털렸고, 리오 프랭크는 ‘메리 페건 기사단’에게 납치됐다.
리오 프랭크는 조지아 주 작은 마을 매리에타에서 오전 7시, 시신으로 발견됐다.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였다. 시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있었다. 메리 페건의 고향에서 죽음을 맞았다.
1986년 조지아주는 그의 사면을 발표했다. 그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나서였다. 무죄 추정, 피의 사실 공표 금지와 같은 근대 문명이 천명한 모든 법원칙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리오 프랭크’는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야만의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선진 대한민국’이라고 다를까. 최근 일련의 사건 속에서 언론과 수사기관의 모습은 1913년 미국 애틀랜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언론인으로서,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ㅇ1913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13세 소녀 강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ㅇ언론과 수사기관은 (증거가 없었음에도) 유력 용의자로 엘리트 공장관리인 리오 프랭크를 지목했다.
ㅇ부자 유대인이 가난한 남부 농민의 딸을 죽였다는 소식에 전 조지아주가 분노했고, 시민들이 감옥에서 그를 빼돌린 뒤 때려 죽였다.
ㅇ리오 프랭크는 무죄추정 원칙이라는 법의 대원칙이 무너졌을 때 발생한 희생자였다.
<참고문헌>
ㅇ김인선, 1915년 리오 프랭크 사건에 나타난 성 정치학, 서양사론147호,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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