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강간살인 용의자 때려죽인 ‘선량한 시민들’…진범은 따로 있었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 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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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52] 음습한 공장 지하 사무실. 여느 때처럼 공장 관리인이 새벽 순찰을 돌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묵직한 침묵 속. 그날따라 공기는 더욱 무거웠다. 어딘가에서 피비린내만이 코끝을 스쳤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손전등 빛이 닿은 건 조그만 시신. 13살의 여자, 이 공장에서 일했던 메리 패건이었다. 속옷은 벗겨진 채 목에 띠가 감겨 있었다. 살인이었다. 얼굴에 멍든 자국은 그녀가 끔찍하게 살해당했음을 증명했다.

1913년 미국을 뒤흔든 ‘메리페건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1913년, 4월 21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한 소녀의 죽음은 미국을 두 개의 세계로 분열시켰다. 죽음 이후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인종차별, 무리한 수사, 사적제재가 잇따라서였다. 남과 북은 다시 갈렸고, 서로 다른 민족간 증오가 더해졌다. 세계 최고 문명국을 자랑하는 미국 사회의 민낯이었다. 분열에 불쏘시개를 던진 건 언론이었다. 한 연예인의 죽음이 저널리즘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오늘날, 이 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공장에서 일하던 소녀 노동자의 죽음
메리 페건은 14살 생일을 얼마 앞둔 소녀였다. 조지아주의 작은 마을 메리에타 토박이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부 지역의 가난한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 소박한 꿈을 꾸는 소녀에게 찾아온 건 때 이른 죽음. 연필 공장 지하실에서였다. 그녀가 일하던 공간이었다.
13살의 메리 페건. 조지아주 가난한 농민의 딸인 그녀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1913년 4월이었다.
범인은 누구였을까.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했다. 경비인이었던 흑인 짐 콘리와 공장 관리인이자 부유한 유대인 리오 프랭크였다. 짐 콘리는 그날도 일터에서 술에 취한 채 엉터리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짐 콘리가 살인을 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는 몇 차례 전과도 있었다.

리오 프랭크는 살인 사건 발생 직후 말을 더듬으며 당황해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명문 코넬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하던 그가 살인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범인으로 몰린 ‘엘리트 유대인’ 리오 프랭크
“저 유대인은 변태 성욕자입니다.”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진 뒤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짐 콘리가 아주 말쑥하고 신뢰있는 차림새로 나타나 리오 프랭크의 범행을 일목요연하게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변태적 성욕이 있었다”, “수 많은 여직원을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의 탁자에 소녀들이 나체로 누워있었다”는 둥 구체적 묘사도 쏟아냈다. 재판 마지막에는 리오 프랭크가 메리 패건을 죽였고, 자신에게 그 시체 처리를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의 방청객 모두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사업가 리오 프랭크.
리오 프랭크는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지만, ‘흑인’ 짐 콘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재판부는 짐 콘리의 증언을 모두 채택 했다. 노예제 폐지를 반대한 남부에서 흑인의 증언이 재판부에 받아들여진 최초 사례였다.
1913년 7월 28일의 법정. 리오 프랭크가 중앙에 앉아있다.
스타 검사였던 휴 도시도 리오를 범인으로 몰아세운 일등 공신이었다. 비영리 유대인 봉사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휴 도시는 이렇게 반문했다.

“갸롯 유다도 예수를 배반하기 전까지 친척,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리오 프랭크가 이웃을 웃으며 대하면서 동시에 사무실에서 어떻게 소녀들을 성적으로 짓밟았는지를 자극적으로 묘사했다. 성추행이나, 살인이나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이미 리오 프랭크를 살인자이자 성도착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집중포화 쏟아낸 언론
“유대교의 교리는 기독교 여성의 성폭행을 용인한다.”

언론은 일찌감치 리오 프랭크를 범인으로 낙인찍었다. 재판 직후부터 애틀랜타 지역 3대 일간지인 컨스티튜션, 저널, 조지안은 한 시간에 하나씩 호외를 발행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메리 페건의 시체가 얼마나 잔혹하게 훼손됐는지를 묘사했다. 리오 프랭크가 전처를 살해한 적이 있다거나, 혼외자식이 여럿이라는 둥 기괴한 소문은 ‘데스킹’이라는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지면에 실렸다.

메리 페건 살인 사건을 그래픽으로 묘사한 한 신문.
유대교는 교리상 기독교 여성을 성폭행해도 된다는 한 유대교 신자의 목소리까지 빠지지 않았다. 언론과 저잣거리 풍문은 구분되지 않았다.

이제 리오 프랭크는 애틀랜타, 조지아주의 공공의 적이었다. 저널리즘의 죽음이었다. 저명한 미국의 언론인 스티브 오니는 2004년 이 사건을 다시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보도 윤리 측면에서 프랭크 사례만큼 최악인 건 찾기 어렵다.”

애틀랜타 조지안 1면에 보도된 메리 페건 살인 사건.
각 신문 호외는 번개처럼 팔려나갔다. 기사는 불쏘시개가 됐다. 대중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페건의 장례식에는 지역 주민 1000여명이 찾아왔다. 애도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도 1만명을 넘었다. 그들은 모두 모여 외쳤다. “리오 프랭크를 죽여라”
살인 사건 진범으로 추정되는 짐 콘리.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흑인을 새벽 공장에서 봤다는 목격자가 나왔다. 짐 콘리가 작업복에 묻은 피를 씻는 걸 봤다는 추가 증언도 있었다. 소용 없었다. 대중은 이미 리오 프랭크를 살인자로 믿었다. 후에 학자들은 진범을 짐 콘리로 결론 내렸다.
전 조지아주가 리오 프랭크에 분노한 배경
“리오 프랭크를 사형에 처한다.”

1913년 8월 리오 프랭크의 유죄가 확정됐다. 사형이었다. 짐 콘리는 리오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고작 1년 형을 받았다. 애틀랜타는 그야말로 축제의 도가니었다. 모든 지역민들이 리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를 바랐다. 한 사람을 향한 저주가 이렇게까지 거센 것도 드문 일이었다.

리오 프랭크의 교수형을 요구하는 시민들. 영화 ‘메리 페건 살인사건’의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애틀랜타 시민들의 분노는 단순히 가련한 소녀의 죽음에 대한 동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분노에는 사회적인 맥락이 존재해서다. 북부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가난한 남부 농민들의 ‘박탈감’이었다.

오늘날 유대인은 미국의 대표적 상류계층으로 여겨지지만, 처음에는 멸시받는 존재였다.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제2차 이민 물결로 동유럽 출신 유대인이 미국 남부로 대거 유입되면서 반유대인정서가 빠르게 확산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 특유의 민족성으로 상업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이들을 향한 혐오 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새로운 ‘하얀 깜둥이’(white niggers)로 불렸을 정도였다. 인류학자 카렌 프로드킨은 “미국 유대계 이민자들은 ‘미흡한 백인(not quite white)’으로 취급받았다”고 했다.

1890년대 반유대주의 정서가 담긴 만화.
애틀랜타 역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농민들은 가난의 굴레에 빠져들고 있었다. 점점 부유해지는 유대인을 향한 증오도 커져갔다. 지역민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원흉이 필요했다. 유대인 ‘리오 프랭크’였다. 메리 페건이라는 남부를 대표하는 가난한 소녀가 유대인 자본가를 대변하는 ‘하얀 검둥이’에게 노동 착취를 당하다가 강간 살인까지 당했다는 인식은 그들의 뇌리에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리오 프랭크가 겁탈한 건 이제 메리 페건만이 아니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남부의 시민을, 순결하고 정직한 백인을 강간한 것이었다. 이 케이스를 미국의 인종주의와 섹슈얼리티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한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를 설명한 19세기 삽화. 그랜트 E. 해밀턴 의 ‘그들의 새로운 예루살렘’. 유대인에 대한 질시와 차별의 정서가 담긴 그림이다.
반유대정서 미국에서만큼은 막아야 한다
‘리오 프랭크’ 사건은 이제 애틀랜타를 넘어 전국의 관심사였다. 북부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반유대주의’ 공격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구명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13년 9월 미국 유대인 위원회 회장 루이스 마샬은 집행부 회의를 소집하고 여론전을 펼쳤다.

반유대주의를 피해 유럽에서 도망쳤는데, 또 다시 유대인 학대와 마주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이유에서였다. 반유대 정서가 확대되는 것을 조기에 막아야 했다. 그 첫발이 리오 프랭크 구명이었다. 미국 전역의 유대인들이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 뉴욕타임스의 발행인 아돌프 옥스도 그중 하나였다. 2년 동안의 항소로 사형 집행은 다행히 연기될 수 있었다.

“저희는 봉사하고 사는 순박한 부부입니다.” 리오 프랭크와 아내 루실.
구명 운동이 적극적일수록 애틀랜타 대중의 분노는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부유한 북부인들이 또 다시 돈에 매수돼 리오 프랭크를 감옥에서 빼주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구명 운동은 조지아 주에서만큼은 역효과였다. 반(反)프랭크 운동이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19세기 말 미국 인민당 지도자로 활약한 톰 왓슨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거리의 시민에게, 언론에, 정치인들에게 말했다. “리오 프랭크를 옹호하는 북부 신문들은 모두 유대인 소유다. 서둘러 프랭크의 교수형을 집행하라.”

백인 하층계급(crackers)은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이견 없이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혐오를 퍼뜨리는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 가난한 백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살인마를 살려두지 말아야 한다.” 리오 프랭크에 대한 혐오정서를 쏟아낸 톰 왓슨.
감형이 불러 온 후 폭풍
1915년 6월 25일. 리오 프랭크를 향한 전국적 지지가 결실을 봤다. 조지아주 주지사가 감형 선고를 내렸다. 사형 대신 종신형이었다. 해피엔딩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조지아 시민들이 피의 복수를 다짐했기 때문이다. ‘메리 페건 기사단’이었다. 법이 리오 프랭크를 용서한다면, 정의로운 시민들이 복수를 대신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당시 조지아 주지사 슬레이튼은 매우 인기있는 정치인이었지만, 리오 프랭크를 종신형으로 감형한 이후 조지아주를 떠나야했다.
28명의 조지아 남자가 모였다. 전기 기술자, 자동차 정비공, 자물쇠 제조공 등 일반 시민을 비롯해 조지아 전 주지사인 조셉 브라운 등 전직 고위급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리오 프랭크를 납치한 시민들...그리고 이어진 비극
“리오 프랭크를 죽이자.”

‘정의 실현의 날’은 1915년 8월 16일이었다. 오후 10시에 그들은 차량 8대로 교도소를 급습했다. 교도소는 쉽게 털렸고, 리오 프랭크는 ‘메리 페건 기사단’에게 납치됐다.

리오 프랭크는 조지아 주 작은 마을 매리에타에서 오전 7시, 시신으로 발견됐다.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였다. 시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있었다. 메리 페건의 고향에서 죽음을 맞았다.

리오 프랭크를 교수형에 처한 시민들. 그들은 기념촬영을 할 정도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시체에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하기 위해서였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시신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2의 리오 프랭크를 막아야 한다
그해 조지아주를 떠난 유대인은 6000명에 달했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리오 프랭크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 대표적 오심”이라고 정의한다.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이유다.

1986년 조지아주는 그의 사면을 발표했다. 그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나서였다. 무죄 추정, 피의 사실 공표 금지와 같은 근대 문명이 천명한 모든 법원칙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리오 프랭크’는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야만의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선진 대한민국’이라고 다를까. 최근 일련의 사건 속에서 언론과 수사기관의 모습은 1913년 미국 애틀랜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언론인으로서,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리오 프랭크가 교수형을 당한 자리에 세워진 추모비. [사진 출처=Jrryjude]
<네줄요약>

ㅇ1913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13세 소녀 강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ㅇ언론과 수사기관은 (증거가 없었음에도) 유력 용의자로 엘리트 공장관리인 리오 프랭크를 지목했다.

ㅇ부자 유대인이 가난한 남부 농민의 딸을 죽였다는 소식에 전 조지아주가 분노했고, 시민들이 감옥에서 그를 빼돌린 뒤 때려 죽였다.

ㅇ리오 프랭크는 무죄추정 원칙이라는 법의 대원칙이 무너졌을 때 발생한 희생자였다.

<참고문헌>

ㅇ김인선, 1915년 리오 프랭크 사건에 나타난 성 정치학, 서양사론147호,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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