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군림하던 남편 병수발까지 하다가…

한겨레 2024. 1. 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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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자기애적 성격장애
회사 대표까지 지낸 자수성가형
퇴직 뒤 간암·합병증 거동 불편
부인, 온종일 간병에 심한 우울증
남편, 정신과 상담 뒤에야 배려
게티이미지뱅크

60대 여성 영주(가명)씨는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았습니다. 남편인 민식(가명)씨는 자수성가해 회사의 대표 자리까지 올랐었고, 현재는 퇴직해 집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민식씨는 가난한 농부 집안의 6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보스 기질이 있었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주씨와 민식씨는 대학생 때 처음 만났습니다. 영주씨는 민식씨를 처음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민식씨의 외모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영주씨가 거절해도 민식씨는 끊임없이 영주씨의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영주씨가 “이제 그만 만나자”고 하면 민식씨는 “너와 헤어진다면 나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며 화를 냈습니다. 영주씨는 그런 그의 행동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회사에선 성공한 남편

그런데 결혼 뒤의 생활은 영주씨의 생각과 너무 달랐습니다. 결혼 전 보여줬던 다정한 모습은 없었고 민식씨는 항상 영주씨에게 명령하는 듯한 말투를 썼습니다. 영주씨가 밖에서 돈 벌어 올 능력도 없고 무능하다며 영주씨를 무시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영주씨도 화가 나서 말대꾸를 하면 때릴 것처럼 손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참으며 살았지만 둘 사이에는 따뜻한 대화가 없었습니다. 영주씨는 결국 민식씨에게 이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민식씨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다른 남자가 있는지 캐물었습니다. 영주씨는 평생을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이혼 얘기는 더 꺼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영주씨에게 더 이상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민식씨는 직장에서 성공을 거듭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고 동료들 사이에도 좋은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누구도 민식씨가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존재인지 잘 몰랐습니다. 대표 자리까지 오른 민식씨는 너무 행복했고 이 순간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깍듯이 의전하는 모습이 무척 흡족했습니다. 민식씨는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을 몹시 싫어했고, 결국 불만을 터뜨린 사람들은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뒤 민식씨는 자신을 퇴진시킨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과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민식씨는 복통을 호소하며 영주씨와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간암을 발견했고, 민식씨는 급히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후 당뇨병과 척추협착증이 생기면서 거동이 불편해졌습니다. 거의 매달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 간병은 모두 영주씨의 몫이었습니다. 민식씨는 음식을 가리는 것이 많아 항상 영주씨가 도와줘야 했습니다. 영주씨는 간병인을 쓰고 싶었지만 민식씨는 쓸데없는 돈을 쓴다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영주씨는 민식씨가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아침저녁에만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수발로 온종일 민식씨를 봐야 하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영주씨는 심한 우울감과 의욕 저하로 꼼짝도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민식씨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영주씨를 찾았습니다. 영주씨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고 결국 민식씨와 함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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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허혈성 변화’로 우울증

영주씨는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고, 음식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연 뒤에도 무엇을 가지러 갔는지 자주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치매 검사 결과, 영주씨는 방금 들은 것을 기억하는 단기 기억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간단한 계산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공명영상에서 뇌 위축은 없었지만, 뇌의 곳곳에서 ‘허혈성 변화’(brain ischemic changes)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뇌의 허혈성 변화는 뇌의 작은 혈관들이 막혀서 미세하게 손상이 된 상태로,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잘 조절되지 않으면 흔히 생깁니다. 허혈성 변화가 반드시 치매나 뇌졸중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병변이 많은 경우에는 위험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뇌의 허혈성 변화가 전두엽 부위에 많이 오면 성격 변화나 우울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영주씨는 특히 남편에 대한 분노감이 오랜 기간 억눌려 있었고 올가미에 걸려 있는 듯한 답답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부부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전을 모시고 사는 느낌이었습니다. 남편의 무시를 참아가며 병수발을 들면서 화도 났지만 ‘이 사람이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도 공존했습니다.

민식씨에게선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확인됐습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한 느낌 △성공과 권력 지향 △특별 대우와 과도한 숭배 요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지배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결여 △오만하고 건방진 행동 등의 증상이 있습니다.

민식씨는 영주씨의 우울증과 뇌 상태를 듣고는 처음으로 영주씨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기애적 성격을 인지하고, 앞으로는 영주씨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타인에게 지시하는 습관을 버리고 힘든 점이 없는지 헤아려보기로 했습니다. 특히, 영주씨에게 호통을 치는 행동은 영주씨의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절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영주씨는 남편이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가 아닌지 걱정해왔는데 그런 건 아니어서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위한 시간만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위해 우울증 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뇌의 허혈성 변화도 매일 오전에 30분씩 걷고 당뇨·혈압을 꾸준히 관리해 많이 좋아졌습니다. 영주씨는 남편 민식씨에 대한 분노가 점점 줄어들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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