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남에게 베풀어야 ‘악당 유전자’ 활동 줄어든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
한눈에 봐도 어린이가 쓴 귀여운 글씨체의 메모 사진이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화제가 됐다. 자신을 ‘○○○호 어린이’라고 소개한 이 아이는 “달달한 간식 드시면서 2024년에도 힘내세요”라며 자신이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내부에 이 메모를 붙였다. 사람들이 하나씩 떼어갈 수 있도록 초콜릿과 사탕을 포장해 테이프로 함께 붙여 놓았다. 이를 본 주민들은 ‘덕분에 행복한 아침^^’ ‘행복했습니다’라고 답글을 남겼다. 한 주민은 세뱃돈이라며 만 원짜리를 붙여 놓기도 했다.
이 밖에도 연말연시에는 유난히 가슴 따뜻해지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온다. 폐지 주워 모은 돈과 함께 팥죽 100그릇을 지자체에 기부한 쪽방촌 사는 할머니, 빚 갚기도 빠듯하면서 수년째 지역 보육원 아이들에게 신발 등 생필품을 보내주는 부부 등…. 이렇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마음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과 선행을 베푸는 소식을 접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단지 지켜보기만 하는 우리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대단한 기부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때때로 이렇게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작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내가 받을 때보다, 남에게 줄 때 더 행복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때 남에게 베풀며 느끼는 따뜻한 감정은 긍정적인 정서적 환기를 일으킬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몸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암, 치매, 심혈관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친절과 질병 예방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신기하게도 사실이다. 몸과 마음이 기묘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받으면 몸이 아픈 이유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몸에 좋다는 것은 그와 반대 상태인 스트레스가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트레스가 몸에 미치는 악영향은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염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에서 불안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과하게 활성화된다. 편도체는 불안과 관련한 신체의 신경망을 자극하고, 그러면 혈관에서는 염증이 생성된다. 몸속 염증 수치가 높다는 것은 각종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그 결과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염증 발생 빈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협심증, 뇌졸중, 심근경색 등 심혈관질환 발생 비율이 높았다. 연구진은 “관찰 기간을 더 길게 본다면, 스트레스가 암이나 치매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결국은 심각한 신체 질환 발병에 영향을 줄 수 있단 얘기다.
따뜻한 기분, ‘악당 유전자’ 활동 멈추게 해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마음 건강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마음챙김’ 명상 앱을 이용하거나, 심리 상담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보다 일상에서 좀 더 간편하게 시도해 볼 수 있는 마음 건강 챙기기 활동이 있다. 바로 남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하기’다.
학계에서는 최근 10년 동안 친절의 효과에 관한 연구가 어느 때보다 많이 이뤄졌다. 수많은 연구는 ‘남들에게 친절하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친절의 효과는 가족이나 친구 등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도 비슷하게 나타났다.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돕는 마음은 “내 삶은 꽤 괜찮다”는 긍정적인 정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든든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때 스트레스에 의해 활성화됐던 염증 반응이 약해진다. 우리 몸에는 염증을 유발하고, 암이나 치매, 심혈관질환 등을 일으키는 유전자 53개가 있다. 이 무리를 통틀어 학술용어로 ‘역경에 대한 보존 전사 반응(conserved transcriptional response to adversity·CTRA)’을 일으키는 유전자라고 한다.
하루 세 번, 친절 행동 실천했더니 나타난 변화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실시한 재미있는 실험을 살펴보자. 캐서린 넬슨 커피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은 성인 159명을 모집해 4주간 실험했다. 이들을 4개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다른 사람에게 하루 세 번 크고 작은 친절을 베풀라는 미션을 줬다. 지인을 초대해 음식 대접하기, 감사 편지 쓰기, 안 친한 사람에게 커피 사주기 등 본인이 원할 때, 원하는 행동을 하라고 했다.
나머지 3개 그룹은 △자기에게만 좋은 행동하기(마사지 받기 등) △불특정 다수를 위해 좋은 일 하기(길가에 쓰레기 줍기 등) △평소대로 살기(대조 그룹)로 나눴다. 대조 그룹을 제외하고는 마찬가지로 하루 3번, 4주 동안 이 같은 행동을 하라고 했다. 또 이들에게 하루에 어떤 행동을 실천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를 쓰도록 했다.
남을 위하는 마음, 나만 위한 쾌락보다 ‘강력’
그렇다면 나에게 베푸는 친절과 관대함도 비슷한 효과를 낼까?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기분이 좋아져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앞서 소개한 실험에서 마사지 받기 등 4주 동안 하루에 3번 자기만 즐거운 일을 한 그룹은 악당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전혀 감소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반면, 남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의 행복감은 꽤 오래 간다. 앞서 소개한 커피 교수 연구진의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남에게 친절을 베푼 그룹은 실험이 끝나고 2주 후까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다. 다른 이들이 친절에 보답하는 선순환이 일어난 결과다. ‘수업 땡땡이’ 같은 쾌락을 추구한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행복감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연구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남에게 친절을 베풀 때 더 행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대상 연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서 성인 152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쾌락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악당 유전자의 발현 정도가 낮았다. 연구에 참여한 이성하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연구원은 “이런 경향은 젊은 층보다 노년층에서 더 두드러졌다”며 “삶의 의미를 찾고,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노년기 심신 건강에 이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노년기로 갈수록 다른 가치보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좋은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높아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내 삶은 의미 있다” 느끼는 게 핵심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은 친절 자체라기보단 친절을 베푼 뒤 따라오는 “내 삶은 꽤 괜찮다”는 느낌이다. 또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고 느낌으로써 삶에 더 만족하게 된다. 다만 한가지 전제가 있다. 바로 자발성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한 영향력을 끼칠 때 이 공식이 통한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비즈니스 친절’이나 형식적 봉사는 오히려 정신노동에 가깝다.
실제로 자발적 봉사활동에 나선 사람들은 심신에 좋은 영향을 받았다. 스티븐 콜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의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9개월간 초등학교 1~3학년 문제아의 학습 멘토링 봉사를 한 성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악당 유전자 활동이 저하됐다. 아이들의 학교 적응을 도우면서 자기 삶이 ‘의미 있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긍정적 영향을 받은 덕이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친절과 선행을 베풀면 행복감이 생겨나고, 스트레스에 의해 활성화됐던 질병 유발 유전자들의 활동이 약해진다. 꼭 거창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앞서 소개한 친절 베풀기 실험에 참여한 이들이 한 일은 뒤에 오는 사람 문 잡아주기, 버스에서 자리 양보하기, 직장 동료에게 감사 메모 남기기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런 작은 친절이 척박한 심리 상태를 회복시키고,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니 놀랍지 않은가. 새해 다짐 목록에 ‘하루 세 번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기’를 추가해 보는 건 어떨까. 몸과 마음의 건강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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