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눈이 멀면’ 장애인 차별인가 [노원명 에세이]
언중위가 문제 삼은 기사의 제목은 “달달함에 눈멀어 다 털린다…‘로맨스 스캠’ 주의보”다. 언중위는 이중 ‘눈멀어’가 시각장애에 대한 차별표현에 해당한다고 본 모양이다.
신체장애, 비속어, 외래어 등의 표현에 있어 그 사용 범위에 관한 논란은 신문업계에서 오랫동안, 늘 있었다. 신문의 일이 대부분 그렇듯 거기엔 무슨 정해진 법률 같은 건 없다. 신문은 그날그날의 상식을 활자로 옮기는 매체이고 그 상식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예컨대 ‘자살’이라는 용어는 꽤 오랫동안 신문에서 금기시되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많은 신문이 자살 대신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을 채택하고 있다. 근자에는 ‘극단적 선택’이야말로 자살을 하나의 선택지로 치환해 마땅히 환기되어야 할 도덕적 책임을 외면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나는 그 주장이 매우 타당하다고 보는 쪽이며 조만간 자살이 극단적 선택을 대체할 것이라 예상한다.
한 유력정치인이 그의 친족을 겁박하면서 특정 신체 부위의 훼손을 언급한 사실을 한국 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신문도 그 정확한 표현을 활자로 옮겨적지 않았다. 비속어, 욕설에 해당해 인터넷 댓글창에도 입력이 되지 않는다. 왜 여성의 생식기를 순수 한국어로 말하면 욕이 되고 영어로 표현하면 허용되는가 하는 문제는 언어학회 토론주제로는 적합하다. 그러나 신문은 이 문제로 토론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순수 한국어는 해부학적 설명 용도가 아니라 모욕과 혐오감을 주려는 의도에서 쓰이는 욕설이기에 신문은 쓰지 않는다.
신체 장애와 관련된 기피 용어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병신’의 사전적 의미는 ‘병든 몸’으로 그 기원이 특별한 악의에서 비롯됐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 단어가 오랫동안 쓰이면서 획득한 사회적 맥락과 활용은 상대를 저주하는 욕설이라는 것이다. 신문이 ‘병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장애인 비하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욕을 지면에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으로서의 그 판단은 까다롭지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신문이 언어를 판단하는 기준은 국어학자나 언어학자와는 달라서 상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식이 모든 사람에게 쉬운 것은 아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달달함에 눈멀어’를 시각장애 차별로 보는 것은 상식적인가. 나는 언중위 공문을 보는 순간 ‘도그마에 눈멀어’란 표현이 떠올랐다. 중세 종교재판관은 신성 모독의 흔적을 찾아내려 피의자가 쓴 모든 단어를 샅샅이 해부한다. 맥락은 지워버리고 단어 하나로 상상에 가까운 논리의 가지를 치는 것이 유능한 재판관이 할 일이다. 반공 독재 시절 검열관은 대학생의 불온한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소유한 도서목록을 모두 훑었다. 책을 읽지는 않았던지 ‘칼 막스’와 이름이 겹치는 ‘막스 베버’를 불온의 증거물로 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달달함에 눈멀어’에서 시각장애인을 유추하는 것은 맥락을 읽는 독법에선 불가능하다. 신문에 쓰인 모든 언어와 장애차별의 연관 정도를 따지고 점수 매기려는 ‘검열 독법’이라야먄 가능하다. 신문 기사는 매우 건조한 산문이지만 제목 만큼은 시적이어야 한다. 시는 상징과 은유로 독자의 눈길을 끌고 10여 자로 모든 것을 압축하는 괴력이 있다. 매일 시로 제목을 달아야만 하는 내 동료 편집기자들에게 ‘달달함에 눈멀어’가 장애차별이라는 판정은 썩 납득되는 얘기가 못 된다.
진짜 시를 써야 하는 시인이 걱정이다. 시인이란 매일 무언가에 눈머는 사람이 아닌가. 대관절 눈멀지 않고 무슨 문학을 한단 말인가. 무언가에 눈먼 사람이 ‘눈멀어’란 표현을 쓸 수 없다면 그걸 무슨 말로 대체할 것인가. 인간이 가장 자주 눈머는 경우는 사랑에 빠질 때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눈머는 것은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눈먼 사랑은 그야말로 맹목적(언중위 기준이라면 맹목적이란 말도 장애인 차별일것 같다) 사랑이다. 눈이 멀지 않고서야 자기보다 덩치도 크고 여드름투성이인 고등학생 아들이 귀여워 죽겠는 부모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신에 눈멀기도 하고 슬픔에 눈멀기도 한다. 눈머는 것은 장애비하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증거다.
나는 ‘벙어리장갑’하면 고깔모자가 떠오르고, 시골집을 뒤덮던 함박눈이 떠오르고, 벙어리장갑과 고깔모자를 쓰고 볼이 빨개지도록 눈사람을 만들던 6살 소년이 떠오른다. 벙어리장갑을 기사에 쓰면 장애인 유관단체에서 어김없이 항의 메일이 날아온다. 지금 내가 기사를 쓰는 이 문서작성 프로그램은 벙어리장갑을 ‘손모아장갑’으로 바꾸라고 자동 명령한다. 벙어리장갑에서 떠올려지는 유년의 기억과 귀여운 소년의 얼굴이 손모아장갑에선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신문은 벙어리장갑이란 따뜻한 용어를 잃고 말았다.
언중위가 더욱 노력한다면 신문은 조만간 ‘눈멀어’란 표현도 잃게 될 것이다. 신문은 그 시대 상식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므로 다수 대중의 귀에 ‘눈멀어’가 차별적으로 들린다면 언중위가 다그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된다. 그러나 아직 내 상식에서 ‘눈먼’ 사람은 사랑에 눈먼 베르테르이고 권력에 눈먼 코모두스 황제이다. 눈멀어서 아름답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하다. 그러나 장애차별과는 아무 상관 없다.
소설 ‘1984’에서 인민들은 다양한 어휘를 쓰는 것이 금기시된다. 가령 ‘추운(cold)’의 반대말로는 ‘따뜻한(warm)’이 아니라 ‘안 추운(uncold)’이, ‘좋은(good)’의 상대어로는 ‘나쁜(bad)’이 아니라 ‘안 좋은(ungood)’이 장려된다. 다양한 언어는 다양한 사고를 낳고 불온함의 토양이 된다. 나는 장애 차별을 지양하는 언중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할 일을 하고 있다. 내 직업은 다양한 언어를 통해 다양한 사고를 유지하고 그로써 획일성이나 ‘강요된 올바름’으로부터 우리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이다. 나도 내 일을 해야겠다. 앞으로도 ‘눈멀어’를 신문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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