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손자’ 이정후의 ‘MLB 대박’은 어떻게 가능했나 [경기장의 안과 밖]
‘바람의 손자’ 이정후(25)가 2024년에 메이저리그에서 뛴다. 메이저리그가 최대주주인 방송사 MLB 네트워크는 2023년 12월13일(이하 한국 시각)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이정후를 영입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구단이 계약 사실을 발표했고 메디컬 테스트를 거쳐 12월16일 입단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정후는 메이저리그 첫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기록을 세웠다. 공개된 계약조건은 최대 6년 기간(4년 뒤 선수와 구단의 합의로 해지 가능)에 총액 1억1300만 달러(약 1475억원)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역대 동아시아 프로야구 리그 출신 타자로는 가장 큰 액수다. 올해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한 요시다 마사타카의 5년 9000만 달러 기록을 깼다. 연평균 1883만3333달러(약 246억원)도 역시 1위다.
이정후는 KBO리그 통산 7시즌 타율 0.340을 기록했다. 2000타석 이상 기준으론 역대 1위다. 선수 몸값에는 기량 외에도 (나이와 관계 있는) 미래가치, 시장 상황, 계약 구단 상황, 리그 환경, 에이전트의 협상능력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이정후는 2024년 8월에 26세 생일을 맞는 젊은 선수다. 메이저리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10년 동안 연평균 매출증가율이 5.8%인 호황기였다. 팬데믹 영향에서 벗어났고, 이번 오프시즌에 FA 시장은 오타니 쇼헤이의 10년 7억 달러 계약이 보여주듯 활황 국면이다. 이정후를 영입한 샌프란시스코는 수년 동안 대형 선수를 영입하지 못해 몸이 달았다. 리그 전체적으로 홈런과 삼진이 과거보다 크게 늘어났고, 수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정후처럼 타격 능력을 갖춘 중견수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에이전트는 스콧 보라스다. 메이저리그 전문가인 송재우 해설위원(MBC SPORTS+)은 “2019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사장을 맡고 있는 파르한 자이디는 보라스와 우호적인 관계다. 보라스와 사이가 나쁜 전임자 브라이언 세이빈 단장이라면 어려웠을 계약이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이정후의 ‘잭팟’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이름 붙이자면 ‘아시아 타자 디스카운트’의 해소다.
동아시아는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프로야구 리그가 활성화된 지역이다. 1964년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처음으로 동아시아 프로리그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30여 년 뒤인 1990년대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의 성공으로 이 지역 출신 선수들의 메이저리그행이 시작됐다. 투수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박찬호는 통산 124승으로 아시안 메이저리거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고, 류현진은 최초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땄다. 타이완의 왕젠밍은 2006년 19승으로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투수에 비해 타자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체격과 체력에서 뒤지는 타자들이 북미 대륙을 종횡하며 162경기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따라붙었다.
타자로는 NPB 출신 이치로 스즈키와 신조 쓰요시가 2001년 역사적인 첫 메이저리그 계약을 했다. 이치로는 NPB에서 첫 풀시즌인 1994년 210안타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2000년까지 9시즌 동안 통산 타율 0.353에 OPS 0.943을 기록했다. 이미 미국 진출 전에 ‘역사상 최고 일본인 타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 이치로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3년 1408만8000달러에 계약했다. 계약기간 평균 연봉은 469만6000달러로 200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의 207.4%에 불과했다. 두 배를 살짝 넘는 수준이다. 메이저리그 계약을 한 861명 가운데 149위로 상위 17.3%에 해당한다. 준수한 수치긴 하지만 이치로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치로는 원 소속 구단에 이적료를 줘야 하는 포스팅 시스템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이적료가 연봉 총액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적료를 계산에 포함하면 이치로의 평균 몸값은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의 400.6%, 전체 상위 4.1% 수준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이치로가 예외적인 사례였다. 이치로와 같은 해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외야수 신조의 연봉은 메이저리그 평균의 40.8%에 불과했다. 2003년엔 NPB 최고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쓰이 히데키가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이적료 없는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이었지만 메이저리그 평균의 273.9%에 그쳤다. 2019년까지 포스팅과 FA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NPB 출신 타자는 모두 15명이다. 대다수가 NPB에선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첫 계약에서 이적료까지 포함한 평균 몸값이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의 두 배를 넘은 선수는 이치로를 포함해 네 명뿐이다. 이 기간 KBO리그에서도 2015년 강정호를 시작으로 박병호, 김현수, 이대호, 황재균이 메이저리거가 됐다. 박병호는 연봉으론 메이저리그 평균의 68.5%였지만 이적료를 포함하면 141.8%로 다섯 명 중 유일하게 100%를 넘었다.
‘아시아 디스카운트’를 인종적 편견의 산물로만 볼 수 없다. 실패 사례도 많았다. 시카고 컵스는 2007년 시즌 종료 뒤 후쿠도메 고스케와 4년 4800만 달러 대형 FA 계약을 했다. 평균 1200만 달러로 2007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의 380.4%에 달하는 특급 계약이었다. 이적료를 제외한 연봉 기준으로는 어떤 일본인 선수도 300%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후쿠도메의 성적은 기대와 연봉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후쿠도메 이후 NPB 출신 타자에 대한 평가와 몸값은 크게 하락했다.
동아시아 리그 ‘타자’에 대한 평가 달라져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2022년 컵스는 스즈키 세이야, 보스턴 레드삭스는 요시다 마사타카를 5년 계약으로 영입했다. 평균 연봉은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 대비 385.0%, 366.8%였다. 이적료를 포함하면 각각 441.0%, 429.5%다. 이적료를 포함한 비율은 20년 이상 묵은 이치로의 기록을 깼다. 이정후의 6년 계약은 연봉 기준 383.8%, 이적료 포함 447.7%로 두 선수와 엇비슷하다.
이들이 자국 프로리그에서 이룬 성취에 대한 평가가 과거보다 훨씬 높아진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오타니의 슈퍼 계약을 다루며 “일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이어가는데도, 회의론자들은 비판할 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오타니는 미국의 방식으로 미국 선수들을 능가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올해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김하성은 동아시아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일본 야구의 성장이 메이저리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최근 일본 투수들의 구위가 향상되며 타자들의 기량도 함께 올라갔다는 평가가 많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선수의 활약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라고 말했다. 투구나 타구에 대한 데이터 측정과 분석이 표준화된 점은 아시아 선수에 대한 편견이 줄어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메이저리그 프런트 출신인 대니얼 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얼스가 김광현을 영입할 때 일이다. 구단 담당자로부터 ‘매일 아침 내 책상에 김광현의 트래킹 데이터가 올라온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이정후의 국내 에이전시인 이예랑 리코스포츠 대표는 2023년 12월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윈터미팅에 참가했다. 이 대표는 “다소 과장하면 오타니와 (메이저리그 진출을 공언한) 야마모토 요시노부에 대한 말만 들렸다”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일본 선수뿐 아니라 강정호와 김하성 등 한국 선수들도 동아시아 타자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선수는 결국 다른 선수의 계약을 딛고 더 나은 계약을 따낸다. 그런 점에서 선수들은 동업자다”라고 말했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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