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젊은 작가들의 희곡을 읽다 [독서일기]
지만지드라마 펴냄
28년 전에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드러눕는 개〉가 〈엎드리는 개〉(안온북스, 2023)라는 제목으로 새로 번역되었다. 1954년 열여덟의 나이로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사강은 이 한 작품으로 단번에 한 시대의 문학 영웅이 되었다. 비평가들은 ‘사강의 세계’ 또는 ‘사강스럽다’를 뜻하는 ‘Univers Saganesque’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사강이 고작 20대 중반일 때 두 권이나 되는 전기가 나왔다. 사강의 남자친구 베르나르 프랑크는 마리 도미니크 르비에브르의 〈사강 탐구하기〉(소담출판사, 2012)에서 “전쟁 이후 프랑스 문학에는 사르트르와 사강, 두 명의 스타만 있었소”라고 증언했지만, 장 폴 사르트르는 20대에 전기를 헌정받은 바 없다.
사강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슬픔이여 안녕〉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는 작가의 시그니처인 정념이 들어 있는데, 〈드러눕는 개〉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앞선 작품들의 주인공이 팜므파탈(악녀)의 기운을 가진 여성들이었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게레는 스물일곱 살 된 무기력한 청년이다. 게레는 미국 갱영화에 나오는 험프리 보가트를 흉내 내며 그를 이상화하는데, 그 행동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게레의 유년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갱들이 분실한 고가의 보석 주머니를 줍게 된다. 담뱃불을 붙이는 것마저 영화 속의 험프리 보가트를 흉내 냈던 이 미성년은 이 기회에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뜻밖에도 게레는 어머니뻘인 하숙집 여주인 비롱 부인(상징적이게도 ‘마리아’라고 불린다)에게 연모를 바치게 되는데, 비롱 부인은 사강 소설에 나오는 또 한 명의 팜므파탈이다.
프랑스 전후세대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은 단연 사르트르였고, 대중의 화제는 실존주의였다. 〈슬픔이여 안녕〉에 나오는 세실에게는 실존주의자의 사고방식이 체화되어 있고, 〈드러눕는 개〉의 게레에게도 실존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 있다. 그래서 사강의 소설이 사르트르를 통속화했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사르트르는 사강이 첫 소설을 발표할 때부터 그녀의 변함없는 지지자였다. 거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사강은 사르트르가 사망하기 전 1년 동안, 시력을 잃은 사르트르를 위해 열흘에 한 번씩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었고, 사르트르를 감시하는 보호자들의 눈을 피해 스카치위스키를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사강의 에세이집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소담출판사, 2009)에 나오는 이야기다.
〈2023 봄 작가, 겨울 무대 희곡집〉(지만지드라마, 2023)은 여덟 개 신문에서 공모한 2003년 신춘문예 희곡부문(+한국극작가협회 신춘문예) 당선자들을 대상으로 한 장막 희곡 쓰기 지원사업으로 결실을 맺은 희곡집이다. 단막극으로 갓 등단한 신인 작가가 장막 희곡을 집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활자로든 무대로든 작품을 선보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대학로예술극장에 박수를 보낸다.
아홉 편 장막 희곡을 잘 읽기 위해, 똑같은 작가들의 등단작을 모은 〈2022 신춘문예 희곡 당선 작품집〉(월인, 2023)부터 읽었다. 이 책에 실린 단막극 아홉 편 중에서 흥미롭게 읽은 작품의 순서대로, 같은 작가가 쓴 장막을 〈2023 봄 작가, 겨울 무대 희곡집〉에서 찾아 읽었다. 좋은 희곡(연극)은 현실의 세계를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발상이 있어야 한다.
조한빈의 장막 희곡 ‘계단’에 나오는 두 청춘 남녀에게 주어진 임무(희망)는 무조건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는 대기자들이 줄을 지어 있고, 정거하는 엘리베이터에는 어디서 탔는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을 택한 두 사람은 자신들의 희망(임무)이 맹목적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오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관성에 지배된다. 그러다가 어느 층에서 잠을 자고 있는 노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청년 실업을 다루고 있는 듯하면서도, 성찰 없는 욕망의 운동을 희화화하고 있다. 주은길의 ‘등산하는 아이들’과 이경헌의 ‘서재 결혼 시키기’는 관객의 관심을 끌 작품이다.
미국 가족의 일상, 그리스 신화 통해 극화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루이즈 글릭이 지금까지 낸 시집 전권(13권)이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에 의해 한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2022년 11월 〈야생 붓꽃〉(시공사, 2022)을 시작으로 〈일곱 시절〉(시공사, 2023)까지 전권 번역이 완성되었는데, 시인은 완간 직전인 2023년 10월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미국(그리고 영국) 시인들은 유럽과 남미 시인들과 달리 정치적 글쓰기에 반대하는 편견이 있는 만큼, 내면에 침잠하는 경우가 많다. 루이즈 글릭 또한 개인이 체험한 일상을 시로 쓰고 있지만, 내면 탐구적이고 다원적 시선(화자)의 중첩으로 읽기가 쉽지 않다.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목초지〉(시공사, 2023)는 현대 미국 가족의 일상적인 문제와 부부 사이의 비대칭성을 그리스 신화의 한 대목을 통해 극화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시집에 나오는 주인공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그들의 아들 텔레마코스, 오디세우스의 정부 키르케다. 이 시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페넬로페의 노래’에서 페넬로페는 20여 년 동안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남편 오디세우스를 “마리아 칼라스처럼 열정적인 노래로” 유혹해보라며 자신을 조롱한다. 그리고 ‘격식’에서는 성격과 취향이 정반대인 이들의 간당간당하고 무감각한 결혼 생활이 풍자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사는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텔레마코스의 거리두기’ 전문이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인생을 바라보는 아이였을 때/ 내가 뭘 생각했게요? 나는/ 가슴이 빠개지는 걸 생각했어요. 이제 나는/ 가슴이 빠개지는 걸 생각해요, 또 동시에/ 미쳐버리는 것도. 또 동시에/ 너무너무 웃긴다고.”
미국인의 약 70%가 하느님의 존재와 천국을 믿는다고 한다. 이런 통계와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는 보수화는 무관하지 않다. 1993년 루이즈 글릭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야생 붓꽃〉에는 신의 존재가 자명하다는 듯이 전제되어 있다. “나 너를 태어나게 해주었지./ 지금껏 내 비통함이 언제/ 너의 즐거움을 막은 적이 있었는지?(‘겨울의 끝’)” 루이즈 글릭은 서정시인의 특권인 전제적 목소리를 화자의 분산을 통해 적절히 제어하면서도, 그동안 침묵한 신에게 잃었던 목소리를 찾아주었다. 시인이 의도한 바 없는 정치적 효과일까, 아니면 서정시인 특유의 정치적 무의식일까.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