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소주값 인하’ 정책에 소비자만 ‘울상’
(시사저널=김경수 기자)
1월4일 오후 8시,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한 먹자골목의 한 음식점. 연말에서 연초로 이어지는 각종 모임 및 회식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새해 덕담과 안부를 물으며 흥겨워하는 사람들 사이로 볼멘소리가 간간이 터져나왔다. "소주 가격이 내렸는데, 왜 아직도 식당 소주값은 그대로냐"는 취지였다. 그럴 때마다 음식점 사장은 "고물가, 임대료, 인건비 등으로 인해 소주값을 내리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이렇듯 새해 벽두부터 때아닌 '소주값 논쟁'이 일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원가에 비례해 세금을 책정하는 종가세 적용 대상인 국산 주류 과세 시 기준판매비율을 도입하는 내용의 '주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기준판매비율은 세금 부과 기준인 과세표준을 줄여주는 세금 할인율이다. 국세청은 기준판매비율 심의 결과, 국산 증류주인 소주의 기준판매비율을 22%로 결정했다.
식당가 "소주값 500원도 못 내려"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는 소주값 안정을 위해 정부가 나선 것이다. 세금을 낮추는 방법을 택했고, 하이트진로가 먼저 움직였다. 지난해 12월22일 소주 제품 출고가격을 10.6% 인하했다. 1병당(360ml) 132원 낮아졌다. '참이슬 후레쉬' 출고가는 1247원에서 1115원이 됐다. 롯데칠성음료도 닷새 후 출고가를 인하했다. '처음처럼' 가격은 4.5% 낮아져 1162원에서 1110원이 됐다. 그 결과,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소주 가격이 낮아졌다. 이마트는 1월2일부터 참이슬 후레쉬 가격을 1480원에서 1330원으로, 처음처럼은 1380원에서 1320원으로 각각 내렸다. GS25, CU, 세븐일레븐 등 편의점 업계도 모두 소주 판매가격을 인하했다.
식당과 주점은 어떨까. 식당·주점에서 판매하는 소주 가격은 서울시 기준 평균 5000원대다. 마트·편의점 등과 달리 식당가는 여전히 기존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 "원자재와 인건비, 임대료 등의 상승으로 고물가가 지속되다 보니 가격 인하는 사실상 어렵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하이트·롯데 등 주류 업체의 소주 출고가 인하 폭이 턱없이 작다는 의견도 있다. 요컨대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11월9일 주정과 소주병 가격 상승을 이유로 참이슬 출고가를 1166원에서 1247원으로 올렸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번 하이트진로 소주값 인하 폭은 51원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롯데칠성도 반출가격 인상과 동시에 기준판매비율이 적용되면서 인하 폭은 52원을 기록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박리다매가 가능한 마트나 편의점은 몰라도 식당·주점에선 인하 폭(50원대)이 작아 실제적인 가격 조정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며 "소비자에게 정부의 이번 소주 가격 인하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식품 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오뚜기는 지난해 11월27일 카레와 케첩 등 제품 24종의 가격을 올리기로 했다가 당일 계획을 백지화했다. 정부가 물가를 밀착 관리하고 있어 제품 가격을 올리는 데 큰 부담을 느낀 것이다. 풀무원도 '요거톡 초코그래놀라' 등 3종의 제품 가격을 인상할 예정이었으나 철회했다. 롯데웰푸드의 경우 소시지 '빅팜'의 가격 인상을 전면 취소했다. 정부의 압박을 못 이겨 가격 인상을 줄줄이 철회한 것이다.
가격 인상이 어려워진 식품 업계는 '슈링크플레이션'(가격은 유지하면서 제품 크기나 수량을 줄이거나 품질을 낮춰 사실상 값을 올리는 효과를 거두는 전략)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제로 오리온은 2022년 10월 초콜릿 바인 '핫브레이크' 가격을 1000원으로 유지하는 대신, 중량을 기존 50g에서 45g으로 줄였다. 농심도 '양파링'의 중량을 기존 84g에서 80g으로, '오징어집'은 기존 83g에서 78g으로 줄였다. 두 제품 모두 가격은 그대로였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슈링크플레이션 논란이 일자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기업들의 제품 용량·규격·성분 등이 변경될 경우에는 포장지와 제조사 홈페이지 등에 이를 알리도록 의무화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반하면 사업자 부당행위로 간주해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린다고도 했다.
일각에선 이러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오히려 물가를 급격하게 치솟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단기적으로는 가격 인상을 억제할 수 있지만, 임계점을 넘기면 기업들이 더 큰 폭으로 가격 인상에 나서면서 물가가 급등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총선 이후다. 업계에선 벌써부터 총선 이후 소주값을 시작으로 줄줄이 가격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총선 후 물가 급상승 대비책 마련해야
전문가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는 주류, 식품 산업 등을 압박해 제품 가격 인상을 강제적으로 보류시키고 있다. 인위적인 가격 통제는 반드시 부작용을 유발하기 마련"이라며 "원자재, 인건비 등이 크게 상승했다. 이렇게 오른 생산비용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지 못한 기업은 계속 큰 손실을 부담하게 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인 국민이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가 급등에 따른 서민의 피해는 소득 지원으로 대응하는 것이 적합하다. 기업이 가격을 부당하게 인상하는 부분이 있다면 시장 구조를 고치면 될 일"이라고 덧붙였다.
실패가 예견된 가격 통제를 즉시 멈추고, 불필요한 인플레이션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총선 이후 가격 통제가 천천히 해제되면 기업들은 누적된 손실까지 반영해 큰 폭으로 가격을 올릴 것이다. 이는 소비자물가 상승을 유발해 결국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을 늦어지게 만든다"면서 "소비자들과 기업 모두 고물가와 고금리의 고통을 겪는 기간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자유시장경제 복원을 공언했던 초심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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