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카르페 디엠’, 지금을 잡아라[서영아의 100세 카페]
12살 손녀와 새봄맞이 전시회 열어
재단법인 실시학사 사무국장 일하며
목공과 민화에 빠져 작품활동
3개월 시한부 선고 이겨내고
“지금 현재를 재미있게 살자”
4일 마포평생학습관 1층에 자리한 시민 전시관 마포갤러리. 올해 칠순을 맞은 이승룡 씨와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외손녀 김리원(12)양의 새봄맞이 조손(祖孫) 전시회 ‘행복을 그리다’의 현장이다.
“양념으로 할머니의 그림 한 점과 손자 리호(3)가 그린 ‘아기상어’도 걸었어요. 말 그대로 이 집안 조손 전원이 출동한 전시회죠. 하하.”(이승룡)
손녀딸이 6학년에 올라간다거나 3살 손자가 그린 낙서인지 추상화인지 모를 그림. 각박해진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고 소소한 의미들이 이곳에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하다. 이제 속칭 ‘7학년’이 됐다는 이승룡 씨는 이런 작은 것에 열과 성을 바치며 행복해한다. 사실 이런 작은 의미들이 쌓이고 모여서 역사가 되고 세계사가 되는 것 아닌가.
한때 잘 나갔지만
그는 30년간 광고회사 LG애드에서 일하다 2009년 55세로 퇴직했다. 2010년부터 모하(慕何)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1932~2015)이 사재 80억 원을 출연해 만든 재단 ‘실시학사’의 상임이사 및 사무국장을 맡아 13년간 일하다가 지난해 봄 여기서도 퇴직했다.
30년간 광고회사 물을 먹었다고 하지만 정작 광고 만드는 일에 관여한 것은 중반기 3년 정도. 나머지는 전략과 조직관리 전문가로 일했다. 2003년 병마로 쓰러졌을 때 직함은 경영전략본부장 상무였다.
“입사 4년 차에 기획관리과장, 8년 차에 부장이 됐습니다. 11년 차였던 1990년 회사는 기획관리실이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고 당시 없던 ‘실장’이라는 직책을 주더군요. 밑에 3개 팀이 있었어요.”
1990년대는 LG애드의 매출이 해마다 1000억 원 단위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3개월 시한부 선고
2003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배가 아파 동네병원부터 찾았던 것이 순식간에 유명 종합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는 사태가 됐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을 포기하고 환부를 다시 닫아버렸다.
종양 근처를 동맥과 정맥이 지나가고 염증까지 있어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3개월 내에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49세. 치료법을 묻는 이 씨에게 당시 담당 의사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글리벡’ 복용을 말했다. 글리벡은 당시 백혈병 치료제로 나온 신약이었다. 이 씨가 “그럼 글리벡이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치료했느냐”고 물으니 그 의사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절망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 그에게 당시 LG전자 고문이었던 이헌조 회장이 전화를 해왔다.
“우리 회사 사장과 모하 회장이 어느 결혼식장에서 만났는데 회장님이 제 소식을 듣고 전화를 주신 거죠. 우연인 듯싶지만 전 이런 건 숙명이라고 믿어요. 회장님은 본인이 암 수술을 받은 일본의 의료진을 소개해줬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 씨 부부는 이 회장의 주치의와 그 제자 2명에게 다시 진단을 받았고 그중 40대였던 야스노 박사가 “확률은 반반이지만 열어봐야 안다”며 수술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재수술은 성공했다.
그 뒤 국내 종합병원에서 20년 가까이 추적관찰을 해왔는데 지난달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이 떨어졌다.
다행인 일은 또 있었다. 일본에서 두 달간 입원해 있다가 귀국한 그에게 회사는 ‘일선에서 일하기 어려울 테니 상근감사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회사는 다국적 광고그룹 WPP에 매각된 상태였는데, 사직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모하 이헌조 전 회장과의 인연
모하 이헌조 전 회장은 그가 1979년 LG애드의 전신인 희성산업(LG애드는 1984년 희성산업에서 독립했다)에 입사했을 때 사장이었다. 2010년 그 모하회장이 LG애드를 퇴직한 이 씨에게 연락해왔다.
“재단을 설립하려는데 설립과 운영을 좀 맡아서 해다오. 처우를 아주 잘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때까지 길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모하 회장은 한국의 사상적 뿌리를 실학에서 찾는 실시학사를 재단으로 설립해 사재를 투여할 생각이었다.
이 씨가 재단에서 일한 지 2년 정도 된 무렵, 지방 어느 상장회사의 감사 자리를 제안받고 고민 끝에 허락을 구하자 모하 회장은 ‘사람이 돈만 갖고 사나?’라고 물었다. 재단에서의 인생이 결코 허술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사람에게는 명분과 긍지가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거죠. 제 생명을 살려주신 분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재단에 남았습니다.”
그는 목공에도 재미를 붙였다. 작품을 만들며 관련된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한 것이 10년간 180점쯤 쌓이자 책 ‘이야기가 있는 목공(2020)’으로 묶어냈다.
기록과 보존에 마음을 담아
그는 기록과 보존에 열심이다. 이렇게 만든 레거시를 적절한 임자에게 의탁해 더 큰 쓰임새를 기대한다.
2015년 선친 이효석 씨(1929~2000)가 남긴 문건과 훈장, 증명서, 기록물 등 148점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손녀 리원 양 이름으로 기증했다. 선친은 독일주재 대사관 수석노무관,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역임했다.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학생 시절 일어난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도 그에겐 기록과 보존의 대상이었다. 당시 3개월간의 백지광고를 모두 모아 제본해서 소장하고 있었다.
“어차피 리원이도 후손이니까 나름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당시에는 손녀밖에 없었고요.”
큰딸이 낳은 리원이 12살, 둘째 딸이 낳은 손자 리호는 이제 3살이 됐다.
시니어들의 가슴 속 앙금
60대 이상쯤 된 분들을 만나보면 뭔가 하나씩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 같은 게 있다. 그의 경우는 13년간 일해온 실시학사가 그랬다.
당초 한국 실학 연구의 태두라 불리는 성균관대 이우성 교수가 만든 공부 모임에 이헌조 전 회장이 80억 원을 출연해 재단으로 만들었다.
이 씨는 2010년부터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2015년 이 회장 사후에는 그 이사직을 이어받아 상임이사를 겸했다. 그런데 2020년 11월 새 이사장이 난데없이 ‘사무국장 정년을 60세로 하자’는 규정을 이사회에서 통과시켰다. 당시 이승룡 사무국장은 66세. “나가라, 못 나간다”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지난해 3월 퇴직했다.
현재 8명의 재단이사진 가운데 과반을 특정 인맥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며 재단에 남겼던 대리인이 타인들에 의해 쫓겨난 셈.
“다른 미련보다 모하 회장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유언하는 거예요?”
―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글쎄요. 너무 많아서.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서 꿈을 맘껏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뭐 특별히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대학에 가거나 그런 거 말고요.”
특별히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자손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할아버지가 지속적으로 책을 만드는 것을 본 당시 3학년 리원 양이 ‘나도 책 한 권 내고 싶다’고 하자 이 씨가 돕겠다고 나섰다.
“그때는 무척 기뻤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림들이 너무 어릴 때 그린 거라서 좀 이상해요. 약간 제 흑역사가 된 것 같아요.^^”(김리원)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리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 유언하는 거예요?”
이 씨가 가족 모임에서 자신의 집을 훗날 어떻게 활용할지 딸들에게 당부하던 중이었다.
“그래. 유언 맞아. 언젠가 할아버지가 없어도 엄마랑 이모랑 이 집을 잘 활용해서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 마음을 말하는 거야라고 말해줬지요.”
책, 세상에 쓰레기를 더하지 않기
이 씨는 2001년 선친의 1주기를 맞아 추모문집을 엮은 것을 시작으로 15권의 책을 펴냈다.
“자꾸 책을 내는 행위가 제게야 의미가 있겠지만 세상에는 별로 공헌하는 바도 없고 낭비일 수 있어요. 그래도 별 부담이 없는 건 주문만큼만 책을 제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책을 내지만 ‘공해는 되지 않는다’고 자위하는 거죠.”
POD방식은 작가 본인을 포함해 누구나 정가로 주문해야 하고 책값의 20%가 작가에게 인세로 돌아온다. 작가는 자기 책을 80% 가격에 사는 셈이다.
―많이 팔렸나요.
“간혹 팔리기도 하는지 몇 달에 한 번씩 몇천 원 또는 2, 3만 원 이렇게 인세가 들어옵니다. 하하.”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
“저도 딸들도 일찍 결혼했어요. 부부 둘만 살면 되니까 큰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데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이 연령대 대부분이 “생각보다 돈 쓸 일이 많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자식들이 집에 돌아와서 손 벌리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다고요.
“자식들이 사고 치면 문제지만 우린 그런 것 없으니까요. 저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목숨 건져 다시 온 뒤 제 인생관이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가 됐어요. 집사람도 크게 사치하지 않고 명품 가방 이런 거에 관심도 없어요. 둘이 어디 여행가고 맛있는 것 먹고, 아무튼 지금 현재를 재밌게 잘 사는 게 목표예요.”
옆에서 부인이 “본래 명품을 싫어했던 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좋은 물건 같은 건 남편이 죽다가 살아 돌아오니 아무 의미 없어지더라구요. 그저 조금이라도 이 시간들이 이어져 주길 바랄 뿐입니다.”(부인 박양화 씨)
“이 나이가 되면 세상에 고맙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저는 인연, 숙명 같은 걸 믿는 사람입니다. 모하 회장 덕분에 다시 살아 돌아온 것,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모두 숙명이 아닐까. 죽고사는 것도 본인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는 세월이 익어갈수록 잘 늙어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야지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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