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린 어깨끈에 경악…"저속한 외국인" 비난받은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시대를 담은 초상화가
존 싱어 사전트
파리 사교계 뒤흔든 '마담 X' 스캔들
'초상화 한점에 2억4000만원'
추락 후 화려하게 부활한 사연
“드레스가 당장이라도 벗겨질 것 같은데! 이런 저속하고 한심한 그림이 있나, 쯧쯧….”
“어깨끈 좀 봐. 이건 정말 끔찍한데.”
“혐오스럽구먼. 이목구비 표현이 지나치게 뾰족하고 눈은 너무 작아. 입은 거의 보이지도 않고. 피부색은 죽어서 썩어가는 것처럼 창백한 데다 목은 비정상적으로 길고, 팔은 빠져 있고, 옷은 붕 떠 있어.”
1884년 ‘세계 최고의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던 프랑스 파리의 살롱 전시장. 5000여점이나 되는 작품 중 가장 주목을 받은 건 한 젊은 미국인 화가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화가는 불과 20대에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초상화가로 떠오른 신인. 모델 역시 파리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셀럽’이었습니다. 가장 ‘핫한’ 화가가 최고의 모델을 그렸으니, 화제가 되는 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관심은 안 좋은 쪽으로 집중됐습니다. 한껏 차려입은 신사와 숙녀들은 그의 그림 앞에 모여 저마다 한 마디씩 작품을 비난했습니다. 마치 ‘누가 가장 재치 있게 작품을 욕하나’를 놓고 경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가요? 찬찬히 한번 뜯어보시지요. 아무리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도 그렇게 욕을 먹을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140년이 흐른 지금의 평가는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화가의 대표작이자 미술사에 남은 명작으로 손꼽히니까요.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왜 그렇게까지 싫어했을까요.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그의 삶과 당시 파리의 분위기를 풀어 봅니다.
위대한 초상화가의 탄생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입니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셀카 앱과 보정 필터가 있는 것도 그 덕분이지요. 반면 증명사진은 좀 다릅니다. 특히 지하철역에 있는 증명사진 기계에서 적나라한 사진을 찍어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분명 기계는 죄가 없고, 사진에 찍혀있는 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내 얼굴인데, 인정하기가 쉽지 않지요. ‘내가 진짜 이렇게 생겼어?’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들고요. 19세기 초상화가가 극한 직업이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특징과 매력을 살리면서도 단점은 손봐서, 모델을 알아볼 수 있으면서도 고객이 만족하는 멋진 초상화를 그리는 것. 이를 위해 초상화가는 그림 실력과 예리한 관찰력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을 본 경험을 갖춰야 했습니다. 1856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사전트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국적과 인종의 얼굴을 보며 그런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유럽 여행을 다니며 생활하던 ‘금수저’ 부모님 덕분이었습니다.
유럽 각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유산을 보고 스케치하며 감수성과 그림 실력을 키우던 사전트. ‘이런 재능을 썩힐 수는 없다.’ 아들의 탁월한 재능을 본 부모님은 그를 확실히 밀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번잡하고 생활비가 비싼 데다 퇴폐적이지만,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아들을 키우기로 한 겁니다. 사전트가 18살이 되던 1874년 2월, 부모님은 사전트를 데리고 당시 파리 최고의 초상화가 중 하나였던 카롤루스 듀란의 작업실을 찾아가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 아들이 선생님 제자로 들어가고 싶은데요….” “그래요? 작품을 좀 봅시다.”
듀란은 사전트가 그려온 작품들을 한 장씩 넘기며 신중하게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실에 있던 듀란의 제자들도 함께 그림을 보러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그림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우와” 하는 학생들의 탄성이 작게 새어 나올 뿐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 잘 그린 작품들이었거든요. 듀란은 곧바로 사전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듀란은 일주일에 딱 이틀만 제자들의 그림을 봐 줬습니다. 좋게 말하면 쿨하고 나쁘게 말하면 냉정한 느낌의 선생님이었는데, 보통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작업실에 들어온 듀란이 작품을 잠깐 살펴본 뒤 손을 내밉니다. 그림을 고칠 붓을 달라는 뜻입니다. 붓을 건네받은 듀란은 아무 말 없이 재빨리 그림의 잘못된 부분에 표시한 후 붓을 돌려줍니다. “다음.”
이런 식의 수업을 하는 선생님은 흔치 않아서, 기록에 따르면 좀 민망한 착각을 한 신입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붓을 달라고 내민 듀란의 손을, ‘그림 참 잘 그렸다’고 손을 잡아주려는 걸로 착각해서 덥석 잡아버렸다네요. 여기에 대한 듀란의 반응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듀란의 성격상 웃어주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냉정한 듀란도 사전트만큼은 좀 다르게 대접했습니다. 듀란은 언제나 사전트의 그림을 오랫동안 살펴봤고,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수가 많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그림 실력이 뛰어난 사전트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존재였습니다. “입학할 때 이미 가르칠 게 없는 수준이었다.” “항상 우리들은 듀란이 사전트를 가르치는지, 사전트가 듀란을 가르치는지 궁금해했다.” “사전트가 선생님보다 잘 그렸다.” 듀란의 제자들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이런 실력을 증명하듯 사전트는 그해 10월 프랑스의 국립예술학교(에콜 드 보자르)에 합격합니다. 그림을 제대로 공부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남들은 몇 년 동안 준비해도 낙방하는 시험에 덜컥 붙은 겁니다. 이후 사전트는 전통적인 유럽 회화의 아름다움과 인상주의를 방불케 하는 세심한 빛 표현, 세련되고 우아한 터치가 결합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각종 전시에서 주목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불과 20대 초중반에 거둔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사람을 그렸는데, 시대를 담아버렸다
이렇게 사전트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외국인’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사전트를 왜 이렇게 띄워줘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왔습니다. 사전트는 생각했습니다.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방’이 필요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걸작을 최고의 무대에 전시해서, 내 실력을 보여줘야겠다.’
그 무대는 살롱이었습니다. 당시 매년 파리의 살롱 카레(지금의 루브르박물관 일부)에서 열리는 살롱 전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 전시로, 축구로 치면 월드컵과 같은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이곳에는 당대 세계 최고 예술가들의 그림과 조각 등 5000여점에 달하는 작품들이 전시됐습니다. 이 기간에 파리는 해외에서 온 ‘미술 관광객’들로 넘쳐났다고 합니다. 사전트가 참여했던 1880년대에는 매년 파리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30만명의 관광객이 살롱을 보러 도시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살롱 전시 때마다 파리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좋은 그림을 칭찬하고 형편없는 그림을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월드컵 기간이 되면 국가대표팀과 선수들의 경기력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것처럼요. 당연히 이런 평가는 화가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이 욕하는 화가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으니, 무관심이었습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처럼요. 그래서 사전트는 생각했습니다. ‘화끈한 주제로 승부해야겠다.’
그런 면에서 파리 사교계의 톱스타,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고트로)는 최고의 모델이었습니다. 미국 출신의 그녀는 전통적인 미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창백한 피부와 미묘한 색조의 화장, 최고의 패션 감각 덕분에 ‘파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으로 불렸습니다. 고트로의 패션이 신문에 실리고, “물에 들어갔는데 화장이 다 지워졌더라”는 등 가십이 잡지에 나올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파리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지요. 수많은 초상화가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서 주목받고 싶어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전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고트로를 설득했습니다. 함께 아는 친구를 시켜 “사전트라는 젊은 천재 화가가 있는데, 너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더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지요. 이런 노력 덕분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걸 좀처럼 허락하지 않던 고트로는 마침내 사전트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사교계 일로 바쁜 데다 인내심 없고 제멋대로인 고트로를 오랫동안 자리에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전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트로는 정말 아름답지만, 절망적으로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다”고 푸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전트는 각고의 노력 끝에 그림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트로는 작품을 보고 “명작이 될 것”이라며 들떴습니다. 스승인 듀란도 사전트의 작품을 보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살롱에서 네 그림은 최고의 화제 작품이 될 거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 작품은 최악의 혹평에 직면했습니다. 사전트는 “실제보다 못생기게 그리는 초상화가”라는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초상화가가 들을 수 있는 최악의 모욕이었습니다. 고트로 역시 파리 시민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했습니다. 그림이 걸작이라고 좋아하던 고트로는 어머니와 함께 울면서 사전트를 찾아와 “그림을 당장 내려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사전트의 작품이 이렇게 욕을 먹었던 건, 사실 그림 실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프랑스의 ‘불편한 진실’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파리의 사교계는 잘 차려입은 신사와 숙녀들이 예의범절에 목숨을 거는, 겉으로만 보면 더없이 귀족적이고 고상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속은 불륜과 매춘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동물의 왕국’. 이런 가식은 파리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건 금기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사전트의 초상화는 이런 금기를 깼습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전트의 그림은 파리 시민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들의 퇴폐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미국의 문화사학자 폴 피셔)는 겁니다. 프랑스의 주요 언론사인 르 피가로는 당시 기사에서 그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쪽 어깨끈이 내려가 있으니) 한 번만 더 몸을 비틀면 그 여인은 자유로워질(옷이 모두 벗겨질) 것이다.” 작품, 특히 한쪽만 내려간 어깨끈이 당시 파리 사교계의 지저분한 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전트는 외국인. 사전트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당시 파리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이런 문란하고 가식적인 것들’이라고 혼나는 듯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겁니다.
그림을 미리 봐준 듀란은 사전트의 그림이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듀란은 자신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뛰어난 제자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좋은 말만 해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이 벌어진 뒤 듀란은 학생들에게 “사전트처럼 되지 말라”고 수시로 경고했다고 합니다. 반면 사전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스승님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그는 나를 싫어했다.”
도망 다니는 초상화가
사전트는 절망했습니다.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을 돌려받은 그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던 어깨끈 부분을 고친 후 도망치듯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영국 미술계 역시 외지인인 사전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그의 작품이 혹평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평판은 더 악화됐습니다.
사전트는 이런 상황을 뒤집기 위해 또다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또 하나의 역작을, 이번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려 발표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그 결과물이 여름밤 등불을 밝히는 소녀들을 그린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입니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전트는 몇 달간 매일 저녁 모델을 세워 놓고 딱 맞는 빛과 하늘색이 나오는 2~3분씩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이번 작품에는 영국 미술계의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테이트 미술관은 즉시 작품을 구입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전트는 파리에서 모욕당한 지 2년 만에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조국인 미국에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30대에 접어든 이때부터 은퇴할때까지 사전트는 누구나 아는 최고의 초상화가로 대접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우리 시대의 반 다이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만큼 초상화값은 비쌌습니다. 한 점당 가격은 지금 돈으로 2억4000만원 이상.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앞다퉈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도 그런 고객 중 하나였습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건 고된 일이었습니다. 가장 큰 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사전트는 모델이 지루하지 않도록 그림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말을 건네야 했고,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을 주면서 피아노를 연주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뭐라도 억지로 말을 해야 한다는 건, 기분이 안 좋을 때도 행복한 척하면서 앉아있는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모르겠어.”
게다가 사전트는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 아주 신중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몇 달에 걸쳐 그린 작품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리고 새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코가 이상하게 그려졌다”고 불평하던 한 모델에 대해 짜증을 내며 이렇게 답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 그런 건 집에 갖고 가서 알아서 고치든 말든 하세요!” 캔버스 구입과 밑 준비, 배송과 기록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처리한 것도 완벽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작업은 더 고단해졌고, 작품에 쏟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사전트가 도망을 다니기 시작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초상화 의뢰를 거절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사전트는 이런 여행을 ‘긴급 대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도 고객들은 그가 여행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 잡지는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회색빛이 감도는 그의 집에는 튼튼한 녹색 문이 달려 있다. 이 문은 영국 왕이 있는 버킹엄 궁전을 비롯해 다른 어떤 궁전의 빛나는 문보다 통과하기가 더 어렵다.” 그만큼 초상화를 의뢰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사전트는 51세의 나이에 ‘이제 절대 초상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초상화가에서 은퇴합니다.
이후 사전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채화도 여럿 그렸고, 벽화 작업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종군 화가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작품을 옮기고 나르는 등 관련된 모든 일을 직접 했습니다. 그리고 71살이 되던 1925년, 편안하게 잠들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추모 미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됐습니다. 이곳에서 근현대 미술가의 추모 미사가 열린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잘 그린 그림의 힘
지금 사전트의 위상이나 그가 남긴 아름다운 초상화를 보면, ‘마담 X’가 그렇게 심한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여러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했다는 건 더 놀랍습니다. “열광적인 예술가라기보다는 능숙한 기술자”(카미유 피사로), “놀랍긴 하지만 판매를 위한 예술”(로트레크), “그저 평범하게 유능한 초상화가”(드가, 휘슬러)처럼요. 그가 미술의 새로운 개념이나 표현법을 만들어낸 ‘혁명가’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 상업예술가에 가깝다는 게 이유입니다.
실제로 사전트는 전통적인 명화를 좋아했고, 현대미술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년에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에 대해 “못생기고, 추하고, 쓸모없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비난을 남기기도 했고요.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초상화를 그린 것도 사실입니다.
사전트에게는 ‘모델의 내면까지 그림으로 그려야겠다’는 야심도 딱히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사전트의 그림에 감동한 어떤 화가가 “당신의 그림은 외모라는 베일을 꿰뚫고 사람의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다”라고 말하자, 사전트는 좀 불쾌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베일이 있다면 그 베일을 그리는 게 화가가 할 일이오. 나는 보이는 것만 그릴 수 있어요.”
그런데도 사전트의 작품에는 모델의 성격과 당시 사회상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파리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억울한 비난을 받았던 ‘마담 X’처럼 말이지요. 보이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를 그렸는데도 인물과 시대까지 그릴 만큼 사전트의 그림은 잘 그려졌습니다.
때로 예술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실력이 너무 탁월해서, 작품에 작가가 알거나 의도한 것 이상이 담기는 거지요. 명작이 명작이라고 불리는 이유이자, 예술의 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감상해 보시지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Sargent's Women: Four Lives Behind the Canvas' (Donna M Lucey 지음), 'The Grand Affair: John Singer Sargent in His World'(Paul Fisher 지음)를 중심으로 <존 싱어 사전트와 마담 X의 추락>(데보라 데이비스 지음, 정영문 옮김, 마로니에북스 펴냄), 'John Singer Sargent and His Muse: Painting Love and Loss'(Karen Corsano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4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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