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태어나는 생명들…붉은점모시나비는 소한에 알을 깬다

한겨레 2024. 1. 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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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생물학자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
소한(小寒), 나비가 알에서 깨고 기린초는 싹을 틔운다
붉은점모시나비 알 속 애벌레.

변온동물인 곤충에게 조금씩 달라지는 기온과 습도는 생존을 위해 꼭 챙겨야 할 필수 정보다. 언제 알을 낳을지, 언제 부화하고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달고 나올지, 먹거리는 충분한지 생활사 전반을 조율하고 결정한다. 며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생물도 절기쯤 되면 생체 시계를 통해 몸에 닿는 공기를 다르게 느끼는 모양이다.

소한 추위는 매섭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눈밭은 적막한 숲과 잘 어울린다.

1월6일 오늘은 소한(小寒)이다. 일 년 중 가장 춥다는 절기인 만큼, 강원도 횡성의 해발 500m 깊은 산 속에 있는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도 추위가 매섭다. 그렇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눈밭은 적막한 숲과 잘 어울린다.

특정 기상과 생물이 어우러져 만든 농업날씨예보 빅데이터인 ‘절기’는 생물에게도 적용된다. 동지부터 소한 이맘때가 되면 진정한 한지성(寒地性) 나비인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본격적으로 알을 깨고 나온다. 붉은점모시나비는 6월 중순 알 속에서 애벌레가 되어 약 190일을 알 속에서 1령 애벌레로 더위를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러다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말~12월 초가 되면 알에서 나오기 시작하는데, 가장 추운 요즘이 바로 그 정점이다.

붉은점모시나비가 알에서 무더기로 부화하는 모습.

어떤 생물도 활기를 띨 수 없을 것 같은 이 추운 겨울에 애벌레는 무얼 먹고 사는지 의아해할 수 있지만,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의 먹이식물인 기린초와 공생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일찍이 겨울 준비에 들어간 기린초가 이즈음이면 양지바른 곳 눈 속에서 새싹을 틔운다.

눈을 녹이며 불쑥 나온 기린초 싹을 털이 복슬복슬하고 거무튀튀한 몸길이 2㎜의 애벌레가 열심히 갉아먹는다. 한 움큼도 안 되는 적은 양이지만 잎이 두터워 애벌레의 한겨울 양식으로는 족하다. 유일한 먹이식물인 기린초가 한겨울에 싹을 주지 않는다면 영하 48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붉은점모시나비의 내한성 물질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눈 속 기린초 새싹.

붉은점모시나비는 한겨울 발육하고 성장하는 세계 유일의 곤충이다. 독특한 생활사를 확인하고 ‘무언가 특별한 물질이 있는 게 아닐까’하는 기대감으로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집중적으로 심층 연구를 벌였다. 그 결과, 붉은점모시나비의 유전체에서 특별한 물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물질은 치주염에 대한 항균 활성 반응을 보였고, 아토피 피부염에도 치료 효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내용은 2021년, 2022년, 2023년 논문으로 발간했다.

극한의 환경을 살아가는 경이로운 생명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간에게 이롭기까지 하니 얼마나 고마운 곤충인지 모른다. 거의 절멸 수준까지 내몰렸던 붉은점모시나비를 살려낼 수 없었다면, 멸종위기종도 보존하지 못하고 물질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는 금강유역환경청과 함께 2020년 이 나비를 증식해 80쌍을 충북 영동군에 방사했다.

겨울의 한 자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생명체는 또 있다. 노랑쐐기나방이다. 맨살을 드러낸 나무 위에 서릿발 맞은 타원형의 노랑쐐기나방 고치가 눈에 띈다. 얼핏 보면 줄무늬 럭비공 같아 보인다. 날카로운 독침 수준의 거대한 가시를 지닌 무시무시한 애벌레가 방적돌기에서 실을 내어 겨울용 고치를 만들었다. 그 고치 안에서 번데기가 되어 겨울을 나는 것이다.

서릿발 맞은 노랑쐐기나방 고치.
노랑쐐기나방 애벌레.
노랑쐐기나방 고치 속 번데기.
여러 겹을 촘촘히 짜깁기한 것 같은 참나무산누에나방 고치.

폭신폭신한 참나무산누에나방 고치와 비교하면 플라스틱같이 단단하고 딱딱한 쐐기나방의 고치는 어떤 놈도 훼손하지 못할 성곽이다. 여러 층의 껍데기로 추위를 견디고 천적을 물리적으로 방어한다. 게다가 건조를 막는 왁스 층으로 습도 유지까지 가능해 노랑쐐기나방 고치는 겨울을 나는 가장 훌륭한 방패막이 된다.

그렇게 표면이 단단하고 딱딱한데 어떻게 쐐기나방이 밖으로 나오는지 고치를 열어 보았다. 어찌나 강하고 딱딱한지 칼로도 쉽게 흠집이 나지 않았다. 연약하고 말캉말캉한 번데기가 어떻게 고치를 가르고 나오는 걸까.

그들에게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 윗부분을 점선으로 동그랗게 미리 잘라놓고 큰 턱으로 건들면 툭 떨어지게 고치를 만든 것이다. 겨울을 나는 가장 훌륭한 방패막이지만 그 방패를 부술 창도 이미 준비했다고 할까.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진화의 결과이겠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묘한 시스템이다.

눈 속에서 자라나는 두메부추 싹.
지난가을 벌과 나비를 불러모았던 두메부추 보라색 꽃.

추위를 즐기며 신나게 자라나는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겨울을 버티는 노랑쐐기나방 번데기가 모두 대단하지만 제 자리에서 묵묵히 봄을 준비하는 풀도 대견하다.

두메부추는 희끗희끗한 눈 속에서 파릇파릇 싹을 내고 있다. 칙칙한 겨울과 맞지 않는 듯 이색적으로 보이지만 이미 작년 가을부터 추운 겨울을 버티며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자라고 있다. 지난가을 벌과 나비를 불러 모았던 아름다운 보라색 꽃. 두메부추가 파릇한 잎을 가진 채 추위를 인내하며 겨울을 나고 있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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