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위드인] 신뢰 깨진 확률형 아이템…게임산업 체질 개선 계기 될까
규제 강화에 입지 좁아지는 '페이투윈' 게임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게이머로부터 의심과 냉소 가득한 시선을 받아온 유료 확률형 아이템에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징금 116억 원이라는 '크리티컬 히트'를 날렸다.
공정위는 지난 3일 넥슨코리아가 2010년부터 2021년까지 '메이플스토리'·'버블파이터'에서 확률형 아이템을 판매하며 소비자에게 불리한 구조로 확률을 변경하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 채 허위로 공지했다며 시정명령을 내리고 이같은 과징금을 부과했다.
캐릭터 장비를 무작위로 강화하는 유료 아이템 '큐브'에서 좋은 옵션이 나올 확률을 몰래 낮추고, 중복으로 출현할 확률은 아예 '0%'로 만들어 이용자들의 과도한 결제를 유발했다는 게 제재 사유의 핵심이다.
정초부터 주력 게임인 '메이플스토리'에 대형 악재가 터진 넥슨은 공정위 제재가 부당한 측면이 있다며 이의신청 내지는 행정소송 가능성을 예고했다.
공정위가 제재 사유로 든 대부분의 사안이 현재는 선제적인 확률 공개를 통해 대부분 해소됐다고도 주장했다.
'확률공개 의무화법' 3월 시행…대통령실도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아야"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1%도 채 되지 않는 '슬롯머신' 수준의 확률형 아이템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오는 3월 22일부터 전면 시행 예정인 개정 게임산업법 및 시행령에 따르면 게임사들은 유료 확률형 아이템의 구성 비율을 의무적으로 게임 내부와 홈페이지에 표시해야 한다.
또 게임 광고에도 확률형 아이템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런 정책이 게임에 확률형 아이템을 넣는 것 자체를 규제하는 건 아니지만, 확률 공개 의무를 어기거나 기재한 내용에 허위가 있을 경우 시정 권고·명령뿐만 아니라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만큼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 국내 게임사 관계자는 "대형 게임사들은 이미 자율규제로 확률을 공개하고 있어 소비자 입장에서는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면서도 "게임사가 새로운 BM(수익모델)을 연구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실은 넥슨에 대한 과징금 부과 발표 당일 "정보 비대칭으로 비롯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 공정한 게임 시장을 조성할 수 있게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그러면서 모바일 게임 표준약관 기준 개정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해외에서도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을 정책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입법부인 유럽의회는 지난해 초 EU 집행위원회에 이용자를 착취하는 랜덤박스와 온라인 도박 산업을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확률형 아이템을 비롯한 모바일 게임의 결제 유도 BM(수익모델) 전반에 대한 규제 입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텐센트·넷이즈 같은 중국 게임사는 물론, 이미 중국에 진출했거나 신규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 게임사 주가도 크게 출렁였다.
결국 중국 정부가 정책을 번복했지만, 페이투윈(돈을 쓸수록 강해지는 게임)에 피로감을 느끼는 게이머들로부터는 오히려 '한국에도 도입이 필요한 정책'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변화 갈림길 선 게임업계…혁신·작품성 잡은 신작으로 신뢰 회복해야
공교롭게도, 국산 패키지 게임 최초로 올해 초 전 세계 판매량 300만 장을 돌파한 '데이브 더 다이버' 역시 넥슨에서 나왔다.
'데이브 더 다이버'는 랜덤박스나 유료 아이템 하나 없이 게임의 재미에 집중한 디자인, 이용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보여주며 여러 해외 게임 전문 매체가 선정한 2023년 대표작으로 꼽혔다. 여러 국제 시상식에서도 '올해의 게임' 후보작에 올랐다.
비슷한 시기 나온 네오위즈의 싱글 플레이 액션 게임 'P의 거짓'은 뛰어난 비주얼과 게임성이 호평받으며 그간 모바일 MMORPG 일색이던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비롯한 6관왕을 차지했다.
모바일 게임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엔씨소프트도 올해 지스타에서 과감하게 PC·콘솔 게임 위주의 전시 공간을 구성했다.
크래프톤은 블록버스터급 콘솔 게임 개발력을 가진 해외 스튜디오를 공격적으로 인수·설립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게임을 내놓으려고 힘을 모으고 있다.
혁신적인 국내 인디 게임 개발사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IP와 기회를 발굴하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확률형 아이템의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업계도 자의든 타의든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게임사를 향한 신뢰는 게임을 자발적으로 즐기며 삶의 활력소를 찾는 게이머의 사랑과 열정에서 나온다.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메이플스토리' 운영진은 지난 3일 라이브 방송을 통해 '흔들린 신뢰'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고민하겠다"라고도 밝혔다.
하지만 신뢰는 흔들린 것이 아니라 깨진 것에 가깝다는 것이 여론의 냉정한 평가다.
한 번 깨진 유리잔의 조각을 아무리 잘 맞춰 이어 붙인다고 해도, 깨지기 전처럼 깔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의 갈림길 앞에 선 K-게임이 확률형 아이템으로 잃은 신뢰를 되찾는 길은 새롭고 혁신적인 IP로 이용자의 사랑을 받는 데 있다.
juju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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