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유인물 건네고 구속된, 44년 만에 기록으로 마주한 나

한겨레 2024. 1. 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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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했습니다
서울의 봄 직후
1980년 여름 유인물 배포로 구금
잊으려던 일, 국가기록으로 확인
있는 그대로 내 삶 직시할 필요
글로 쓰면 잘 정리되고 의미 커져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친구에게 건네고 구속됐을 때의 재소자신분카드. 계엄 포고령을 위반했다는 ‘범죄 사실’이 적혀 있다. 이병남 제공

“병남아, 그때 광주 건으로 우리 잡혀갔던 그 일 말이야. 보상금 신청이 가능하다는데 했니?”

고교 동창이 오랜만에 건 전화에 저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습니다. 친구가 말한 사건은 이젠 아득하기까지 한 1980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친구들에게 5·18 광주항쟁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줬다가 열흘이 넘는 불법구금 뒤에 구속돼 약 40일 동안 서대문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걸 신청하냐?”

친구는 국가기록원에 자료가 있다고 했습니다. 정보공개를 청구하면 기록을 찾을 수 있다는 거지요.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만 있던 그 기록이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하느라 두 주일 이상을 그냥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했고, 관람객 수가 대단하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좀 새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2030 젊은이들이?” 그러면서 1980년 봄에 겪었던 그 일에 새롭게 마음이 다시 갔습니다. 보상금 신청은 나중 문제고 일단 나에 관한 국가기록을 찾고 싶었습니다.

1980년 봄, 일기도 쓰지 못한 이유

신청 요령을 잘 몰라서 국가기록원에 전화로 문의했는데 담당 주무관이 참 친절했습니다. 그러곤 어떻게 정보공개와 보상 신청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느냐고 묻더군요. “당시 같이 고생했던 친구가 알려줬다”고 했더니, “참 좋은 친구를 두셨다”고 하네요. 며칠 뒤 친구와 다시 통화를 하면서 그 얘기를 했습니다. “너가 좋은 친구라더라. 너 땜에 내가 잡혀간 건데 말이야”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광주 관련 유인물을 받았다가 고문 끝에 결국 출처를 실토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 친구를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엄혹했던 시절, 저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며칠 뒤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제 기록을 찾았다는 전자우편이 왔습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관련 링크로 들어갔더니 재소자신분카드라고 적힌 자료의 첫 장에 머그샷이 찍힌 제 얼굴 사진이 있었습니다. 흑백사진 속엔 수번과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암담한 얼굴의 젊은 청년이 거기 있었습니다. 뒷장에는 군법회의 검찰부의 검찰관이 작성한 계엄 포고령 10호 위반이라는 범죄사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법회의 검찰관이 구치소장 앞으로 보낸 석방지휘서에는 불기소 처분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렴풋이 기억하던 날짜들을 구체적으로 보면서 ‘맞아, 그때 그랬었지’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국가가 인정하는 객관적인 사실로 다시 마주치고 난 느낌은 얼마간은 비현실적이기도 했습니다. 44년 전 겪은 나의 일에 관한 국가의 기록을 보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재소자신분카드와 관련 자료를 보니, 그동안 기억의 서랍장 가장 아래 칸에 넣어뒀던 그 사건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날은 아주 화창한 일요일 아침, 성당에 미사 참례하기 위해 막 나가려던 참이었지요. “미안하다. 나와줘야겠다”고 전화한 친구를 만나려 저는 성당 대신 서울역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날이 1980년 7월6일이었다는 건 기록으로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 44년 동안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은 탓이지요. 제 인생에서 아주 큰 일이었지만, 저는 그 일과 관련해 일기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겪은 고초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절반, 군사법원 재판장 앞에서 “잘못했다. 반성한다”고 말한 뒤 석방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절반이었겠습니다.

젊은 내 모습을 기록에서 본 며칠 뒤, 저는 제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자랑스러운 것도 아닌, 그저 있었던 일 그대로 똑바로 보고 인정하는 것이지요. 내가 찾고 또 기록하는 나의 이야기들은 제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남겨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저와 제가 살았던 시절을 계속 만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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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삶이 더 풍성해지는 일

그동안 제가 해왔던 기록은 ‘자연인 이병남’이 아닌 ‘직업인 이병남’으로서의 기록이었던 것 같습니다. 20여년 회사 생활을 할 때의 기록은 내 기록이 아니라 회사의 기록이었습니다. 회사 일과 관련한 각종 제안서·보고서 등 나의 생각과 활동들은 이러한 자료들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일과 관련된 짧은 메모들은 있었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느낌들은 따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의사결정이 중요하고 행동이 중요하고 성과가 중요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은퇴한 뒤 3년 전부터 신문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쓰고 기록하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칼럼의 글감을 위해서도 나의 단상들을 기록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비공개 개인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생활하면서 드는 짧은 아이디어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그때그때 휴대전화를 이용해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꼭지로 치면 이젠 200개가 넘습니다. 그 단상들이 씨앗이 되어서 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제겐 과거의 기록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4년 전쯤입니다. 중·고등학교 동창이 오래돼 누렇게 변한 종이 속 시 한편을 보내왔습니다. 중학교 3학년 가을에 교내 백일장 시 부문에서 장원을 했던 제 글을 교지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제목은 낙엽(落葉). “바람은 싸늘한 내 소매를 핥고 저기 쓸쓸한 가지 사이로 숨는다”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시였습니다. 55년 전 경복궁 향원정 앞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고 쓴 시였습니다. 기억 속에서 희미했던 일이 갑자기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머리 허연 65살 노인이 정서적이고 관념적인 15살 청년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물론 사진이나 동영상도 기록입니다. 그런데 저는 글로 쓰는 기록이 더욱 중요하고, 시간 들여서 그걸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나 느낌이 정리되고 분명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가까이 지내는 한 젊은 친구는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의 자서전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글을 통해서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면서 의미를 찾게 되고 가족들은 어머니를 사후에도 더 잘 기억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기록은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게 되면서 나의 삶이 더 풍성해진다고 느낍니다. 또 기억은 기록을 통해서 뚜렷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되어서 오늘을 비추고 후대에 전해집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미처 꽃을 피워내지 못하고 가지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겨울 속 동토 아래에서 새 생명이 다시 준비되고 결국 봄은 오고야 맙니다. 그리고 그 봄은 여름의 성장으로, 가을의 수확으로 이어질 겁니다. 나의 봄도 그러합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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