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영토 평정”…최악 수준으로 완성된 ‘공포의 균형’

한겨레 2024. 1. 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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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서재정의 한반도, 한세상
2024년 남북관계
남북·북미 정상회담 실패 뒤
제재 뚫고 경제성장 자신감
한미동맹 ‘선제타격’ 추구 대응
“설마 핵 공격?” 의구심 털어내
북한이 지난달 26일부터 31일까지 개최한 연말 노동장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조선’은 왜 이러는 것일까? 이미 여러 조짐들이 있었지만 지난해 말에 나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들은 가히 ‘핵폭탄’급이었다. 12월 말에 개회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가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한 데 이어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겠다”고까지 선언했다. 한국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본 것을 “착오”로 규정하며 남북관계는 동족 관계가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했다.

이제 북은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일까? 한반도는 더 이상 ‘민족 분단’이 아니라 ‘두개의 국가’가 전쟁을 벌이는 상태로 전환되는 것일까? 점증하는 한반도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있는 것일까?

북, 제재 중에도 꾸준히 곡물 증산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김정은의 발언 중 대미관계와 대남관계 부분을 부각시켰지만 그의 중앙위원회 보고 중 상당 부분은 사실 경제 부문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경제계획의 목표를 100% 이상 달성했다는 지표들로 가득했고 8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경제발전계획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제7차 당대회에서 내건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2016~2020)’에 대해 “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 향상에서 뚜렷한 진전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던 것과 대비된다.

북은 2021년 1월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경제발전 5개년 계획(2021~2025)을 채택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경제 부문의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결렬된 이후였다. 오히려 강화되는 경제제재로 한국 및 서구권과의 경제 교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코로나로 촉발된 보건위기를 이유로 2020년 1월 스스로 국경을 폐쇄한 이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5개년 계획은 대외 교류와 지원에 일절 의존하지 않고 자립으로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현재 북은 국내총생산이 2020년 대비 1.4배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가 사실이라면 지난 3년 동안 연평균 12%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수치는 현재 외부에서 검증이 불가능하다. 북은 국내총생산의 1.4배 성장을 주장하면서도 공작기계가 5.1배 성장했다는 등 일부 부문의 수치만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질소비료 생산량이 1.4배 성장했다는 등 공개된 부문의 수치도 현재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동원할 수 있는 외부 자료가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이 1990년대 말부터 거의 매년 발표한 북한의 곡물 및 식량에 대한 보고서가 그중의 하나다. 이 보고서에도 한계가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추세를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 310만t 정도의 식량을 생산했지만, 2010년까지의 10년간 연평균 생산량이 480만t이었고, 2021년까지의 10년 기간에는 570만t이었다. 다시 말해 북은 21세기 들어 10년마다 곡물생산량을 100만t씩 늘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관계가 완전하게 끊겨서 비료가 들어가지 않은 지 오래됐고, 국경을 닫아 중국에서도 원자재가 들어가지 않았던 2021년, 그리고 그 이후에 곡물 생산을 늘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 밑바닥에는 1990년대 말부터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진행되어왔던 농법 개혁과 산업 개혁이 있다. 원료와 연료, 생산시설 모두에서 과학적인 ‘주체화’를 추진한 것이 나름대로의 성과를 낸 것이라고 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경제제재의 일부라도 풀어달라고 했던 ‘굴욕적 요청’마저 거절을 당하자 북은 아예 국가 전략노선을 수정한 것이었다. 더 이상 제재의 해제에 목매지 않고, 한국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립경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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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무력충돌 기정사실화”

경제는 국경을 걸어 잠근 채 개발할 수 있지만 안보 위협은 잠근 국경 너머에서도 들어온다. 국경 폐쇄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과 한국, 일본의 움직임에 눈을 기울여야 하고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군사력에 있어서 절대적 우위를 누리고 있는 한-미 동맹을 상대해야 하고, 이제는 한·미·일 삼각동맹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게다가 한·미·일 삼국은 미사일 방어를 강화하는 동시에 선제타격 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맞춤형 억제’ 전략으로 정권 제거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도 위기의식을 높인다.

그동안 북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이용한 핵억제 전략으로 한-미 동맹의 억제전략에 대응해왔다. 억제에 억제로 대응하여 ‘공포의 균형’을 이루면 어느 쪽도 상대를 공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 동맹이 선제타격 능력을 추구하자 북은 아예 핵무기 선제사용 독트린을 공개했다. 2023년 한반도는 한·미와 북이 서로 상대를 선제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며 이를 언제든 실행할 수 있다고 서로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포의 균형’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미국은 언제든지 북을 공격할 수 있지만, 북이 과연 한국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은 교전국이니 언제 무슨 무기를 사용해서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한국이 미국의 군사전략과 일체화되어 북의 핵기지나 전략본부를 선제타격한다면 북은 같은 민족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을까? 대화와 협력의 상대이고,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의 상대인 대한민국을 핵무기로 파괴하는 것,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동안 대화와 협력을 했던 한국 정부와 민간기구들에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한 북의 핵 독트린에는 커다란 구멍이 남아 있게 된다. 지난해 말 김 위원장이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선언한 핵심적 이유다. 이어 주요 군지휘관을 소집해 “무력충돌을 기정사실화하라”며 완벽한 군사적 대비 태세를 주문함으로써 한국 전 영토에 대한 공격에 주저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설마 북이 한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겠냐는 질문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해서 한반도 ‘공포의 균형’은 최악의 수준에서 완성됐다. 북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원이나 압박에 개의치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동시에 미국은 물론 한국에 대한 핵위협도 가장 강력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신년사에서도 “올해 상반기까지 증강된 한·미 확장억제 체제를 완성해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을 원천 봉쇄할 것”이라며 “힘에 의한 진정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또다시 강조했다. 억제의 증강은 ‘공포의 균형’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 뿐이다.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시카고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국제관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반도와 국제관계에 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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