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대전을 ‘노잼 도시’라 했나…소소한 재미에 멈춰서는 곳 [ESC]

한겨레 2024. 1. 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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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대전 소제동·대동
예쁜 카페촌 이름난 ‘소제동’
철도청 관사 등 옛 정취 간직
비좁고 가파른 산동네 ‘대동’
벽화 지나 꼭대기엔 풍차가
대전 동구 대동 골목에 그려진 벽화.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살아왔던 건 내 의도도 아니었고, 그래서 내 책임이 아니야.” 이런 불평은 12월에 끝내고, 이제는 뭔가 약간의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할 1월. 어떤 결심을 위해 나는 기차를 탔다. 그 결심이 며칠 지나지 않아 희미해지다가 어느 날 새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1월이니까. 그렇다고 뭔가 거창한 의미를 찾기 위한 대단한 떠남은 아니고, 그냥 가볍게 다녀오는 마실 정도다.

언젠가 “뭔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일은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여행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낯선 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미술관을 어슬렁거리거나, 해변에 누워 파도 소리를 즐기면 되는 것, 그것이 현대의 여행이다. 여행을 와서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여행을 가는 것보다 하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우리가 찾고 싶은 무언가는 우리 주위에 있다. 그것들은 책상 앞이나 사무실 주변, 혹은 자주 가는 카페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잘 살펴본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변했다면 그건 여행 때문이 아니라, 살면서 많은 일 특히 실패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대전엔 왜 칼국수집이 많을까

심기일전이 아닌, 기분전환 여행의 목적지는 대전이다. 서울역에서 아침 7시55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면 오전 10시쯤에 대전역에 도착한다. 대전에 가서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이곳저곳 천천히 걷다가 올 요량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전을 ‘노잼 도시’라고 한다. 여행을 가기엔 특별히 끌리지 않는 도시라는 뜻일 것이다. 유명한 여행지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맛있는 음식도, 산도, 바다도 없는 것 같다. 아 참, 소보로빵으로 유명한 빵집이 있구나. 그런데 막상 가보면 소소한 재미가 많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자기들끼리 모여서 재미있고 평화롭게 사는 도시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아주 오래전 라오스 루앙프라방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를 여행하며 이런 느낌을 받았다. ‘아, 남들은 신경 안 쓰고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맛있는 거 먹으며 살고 있구나.’ 대전도 그런 곳이다.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정답게 살고 있는 곳.

대전역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소제동의 옛 철도청 관사 건물.

대전역에서 나와 십여 분 걸어가다 보면 소제동이라는 곳이 나온다. 옛 철도청 관사들이 모여있던 마을이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대전은 ‘철도 도시’다. 대전역 앞 은행동은 가장 번화한 상권이지만, 소제동은 1905년 대전역이 영업을 시작할 때 지은 철도청 관사가 남아 1920~1980년대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당시 북관사촌과 남관사촌으로 나뉘었지만, 한국전쟁 때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동관사촌이던 소제동에 건물 40여채가 있다. 영화 ‘쎄시봉’, ‘제8일의 밤’ 등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소제동에 가기 전, 먼저 칼국수를 먹기로 한다. 대전역 가까운 곳에 유명한 칼국수집이 있다. 1961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칼국수 한 그릇을 시키니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칼국수가 가득 담겨 나온다. 이 집 칼국수를 먹기 위해 일부러 아침도 안 먹었다.

‘신도칼국수’의 칼국수.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국수가 나왔다. 먼저 국물을 맛본다. 진한 사골육수에 멸치 맛도 난다. 면은 부드러워 입안에 부드럽게 감긴다. 대전에는 유난히 칼국수 집이 많다. 이유가 뭘까 궁금해 여기저기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오히려 ‘도대체 그런 걸 알아서 뭐하시게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다. 그런 걸 알아서 뭐하게. 세상에는 알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인 것들이 많다.

 낡은 이발관 지나니 ‘힙지로’

칼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마음으로 소제동 골목에 들어섰다. 골목에 들어서면 지금도 남아 있는 그 풍경에 놀란다. 슬레이트 지붕을 인 집, 낡은 가게와 이발관, 세탁소 건물들이 겨울 햇빛 아래 졸듯 서 있다. 그런데 허름해 보이는 골목으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만난다. 서울 을지로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개성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나온다. 울창한 대밭을 정원으로 삼은 찻집, 마당에 눈부시게 흰 돌을 깔아 우유니 소금 사막을 연상케 하는 식당이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젊은 여행자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이유다. 아주 오래된 이발관도 있다.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니 주인 할아버지가 편하게 들어와 사진을 찍으라고하신다. 포즈도 멋지게 잡아준다.

골목 한쪽에 자리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를 통해 골목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는 커플들도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토니 베넷의 부드러운 저음이 흘러나왔다. 소제동에서 마주하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풍경. 토니 베넷의 느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결심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든다. 그렇지, 새해라고 뭐 딱히 바뀌는 게 있겠어? 2024년에 2024년의 마감이 있고, 2024년의 다이어트가 있을 뿐이지. 바뀌는 게 딱히 없다는 것, 살다 보면 이 사실이 오히려 큰 위로가 된다.

소제동 곳곳에는 개성 있는 가게가 많은데 그중 한 곳인 중식당 모습.

소제동 골목은 돌아보는 데 이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걸음은 자꾸 느려진다. 지나간 가게 앞으로 다시 가고, 오래된 담장의 벽화 앞에서 괜히 발걸음이 맴돈다. 어깨에 내려앉는 햇살이 한결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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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로 한입에 ‘새해엔 화내지 말자’

조금 더 걸어보자 하고 찾아간 곳이 대동이다. 대전 동구 대동 산 1번지. 대동종합사회복지관 인근인데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다다를 수 있는 동네다. 마을 골목마다 예쁜 그림과 조형물이 들어섰다.

대동 가기 전 만나는 길은 자양로다. 전자대리점, 옷가게 등 크고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다. 자양로에서 한밭여중길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금세 바뀐다. 거리는 폭이 좁아지고 낡고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중길답게 분식집, 문구점 등도 볼 수 있다.

길을 계속 따라 대한빌라를 지나면 본격적인 골목 풍경이 펼쳐지고 한밭여중길이 끝나는 곳, 동산마켓을 앞에 두고 좌회전하면 복지관 1길이 시작된다. 그 위로 차례로 복지관 2길과 복지관 3길이 놓여 있다. 골목은 복지관 1, 2, 3길을 뼈대 삼아 사다리 모양으로 걸려 있다. 골목은 대부분은 어른 한 사람이 지나가기 버거울 정도로 좁은데다 이리저리 얽혀 있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건장한 젊은이들도 쉬어가며 올라가야 할 정도다. 골목 양옆에는 자그마한 집들이 빼곡하다.

골목을 걷다가 자주 걸음을 멈춘다. 벽에는 파스텔톤의 꽃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 햇빛이 발등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양지에서는 볕 냄새가, 처마 아래에서는 그늘 냄새가 난다. 삶에는 이런 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만나면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멈춰서는 일. 그저 바라보고, 감각하고, 즐기는 일. 이런 순간을 일주일에 십여분 정도 만들어주는 것이 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마을 꼭대기에 서 있는 커다란 풍차와 만난다. 세상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서 있는 풍차 위로 역시 세상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커다란 구름이 흘러간다. 풍차 앞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저기 사람들이 각자의 아름다운 방식으로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달콤한 사탕을 녹이지 않고 아껴가며 입속에서 굴리듯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대동 마을 꼭대기에 서 있는 풍차.

간단한 여행을 끝내고 열차를 타기 위해 대전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나는 지금 대전의 가장 번화가인 은행동을 걷고 있다. 옷가게와 레스토랑과 카페와 휴대폰 가게들과 길거리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가 모여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성심당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빵집이 있다. 5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다. 십여 분 줄을 선 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달콤한 빵 냄새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이 집의 명물인 튀김소보로를 하나 사서 먹어본다. 고소하고 달콤하다. 그리고 부드럽다.

아, 무릇 모든 인생의 순간이 이 튀김 소보로만 같다면 좋겠다. 빵에는 단 1%의 시기와 질투, 화와 짜증이 들어있지 않다. 다정함과 화해, 연민으로 가득한 것이 바로 빵이라는 음식이다. 어떤 거창한 결심을 위해 대전을 찾은 건 아니지만, 토니 베넷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순간,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튀김 소보루를 먹고 있으니 사소한 결심이라도 하게 된다. 새해엔 화내지 말고, 짜증 내지 말자. 그리고 질투하지 말자. 화와 짜증, 질투는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의 행복이 커진다고 내 행복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만 알면 인생은 산뜻해지고 편안해진다. 대전에 와서 튀김소보루를 먹으며 이런 마음을 가졌으니, 이만하면 이번 여행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대전의 맛집·멋집이탈리안 레스토랑 파운드(070-4177-7171)는 관사로 사용하던 건물의 벽과 천장, 기둥 구조 등은 그대로 두고 실내를 멋스럽게 꾸몄다. 충청도에서 난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만든다.대전역 근처에 별난집(042-252-7761)이라는 두부두루치기집이 있다. 대전 사람들은 두루치기를 즐겨 먹는다. 대전식 두루치기에는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고 두부가 잔뜩 들어간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목이 따가울 정도로 맵다. 여기에 면 사리를 넣어 비벼 먹는다. 밥으로도 좋고 소주, 막걸리 안주로도 좋다.‘숨두부’라는 음식이 있다. 순두부가 아닌 숨두부. 순두부보다 거칠다. 콩 단백질이 엉긴 상태가 살아있다. 짭쪼름한 간수에 담긴 숨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평양숨두부(042-284-4141)는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숨두부 전문점이다. 6·25 전쟁 당시 평양에서 피난을 내려와 문을 열어 지금은 3대를 이어오고 있다.    ‘신도칼국수’ 벽에 붙어 있는 칼국수 그릇의 변천사.  

칼국수는 두부두루치기와 함께 대전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신도칼국수(042-253-6799)가 유명하다. 이 집 벽에는 개업 때부터 사용하던 칼국수 그릇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칼국수 한 그릇에 30원 하던 시절의 노란 양푼은 지금의 칼국수 그릇보다 두 배나 크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시인이자 여행 작가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지은 책으로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boxStyl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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