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 ⑳ 철길과 흥망성쇠 함께 한 탄광촌 삼척 도계
사람 떠나자 기차 사라지고 지역경제 급격히 쇠퇴
"역사인 산업유산은 간직해 보존해야 가치가 있다"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삼척=연합뉴스) 배연호 기자 = 1956년 1월 1일 영암선이 개통됐다.
경북 영주에서 강원 태백 철암까지 총길이 86.4㎞다.
처음으로 철길이 백두대간을 넘어 연결된 것이다.
영암선 개통은 우리나라 석탄산업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석탄 개발이 본격화했고, 산업 발전도 가속했다.
8·15광복 이후 남한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바로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산업철도 건설이었다.
일제강점기 개발했던 탄광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다.
8·15광복 전 북한의 석탄 생산 비중은 80%에 달했다.
게다가 남한은 철도와 도로의 부재로 삼척탄광에서 생산한 석탄을 불과 70㎞ 떨어진 영월발전소로 수송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삼척탄광의 석탄을 영월발전소에 보내려면 삼척 도계에서 묵호항까지 실어 나른 후 묵호항에서 배에 실어 남해를 경유해 인천항으로 운반한 후 다시 철도로 영월발전소로 수송해야 했다.
철길 뚫리자 사람 몰려오고, 석탄 생산량 급증
영암선 개통과 함께 삼척탄광에서 태백∼고한∼예미∼영월∼제천을 잇는 태백선이 1955년부터 1973년까지 구간별로 잇따라 개통했다.
철길이 뚫리자 남한(우리나라)의 연간 석탄 생산량은 1955년 80만t에서 1959년 282만t으로 급증했다.
석탄 생산량 증가는 일자리 급증으로 이어졌다.
일자리가 생기자 경상도 지역의 농민들이 삼척탄전으로 대거 들어왔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자 1981년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이 태백시로, 삼척군 북평읍은 명주군 묵호읍과 합쳐 동해시로 각각 승격했다.
삼척군도 삼척시와 삼척군으로 분리됐다.
석탄산업은 1개 군을 4개 시·군으로 분할하는 우리나라 행정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당시 삼척군 인구는 25만명을 훌쩍 넘었다.
그리고 삼척군 인구 급증의 중심에는 도계가 있었다.
도계 석탄산업 역사 시작은 117년 전인 1905년
도계의 석탄산업은 1950년대 초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검은 노다지의 땅' 도계의 석탄산업 역사의 시작은 117년 전인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성신문은 1905년 1월 23일 자 기사에서 '강원도 삼척 정선 등의 탄광(당시 탄광은 지금의 탄전지대를 의미)을 조사한다'고 보도했다.
이는 조선 왕실이 삼척탄전지대를 1905년 이전부터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다.
1936년 일제의 삼척개발주식회사 설립과 함께 삼척탄광도 본격적으로 개발된다.
당시 삼척탄광 개발의 중심지는 도계였다.
가장 먼저 개발된 갱구는 도계1갱이다.
이어 흥전갱, 점리갱 등이 속속 개발됐다.
도계역∼묵호항 42㎞ 삼척선 1937년 5월 개통
이들 갱구에서 생산된 석탄은 도계역으로 옮겨진 후 기차로 묵호항까지 옮겨졌다.
석탄 수송을 위해 일제는 도계역에서 묵호항까지 42㎞ 구간에 철도(삼척선)를 건설했다.
삼척선은 1935년 6월 착공해 1937년 5월 개통했다.
삼척탄광 개발 붐은 인구 유입으로 이어졌다.
삼척탄광이 남한지역 최대 탄전으로 급부상하자 너도나도 노다지의 꿈을 안고 도계로 몰려왔다.
삼척군 인구는 1935년 8만8천700명에서 1940년 12만5천81명으로 늘었다.
인구가 5년 만에 약 1.5 배로 급증한 것은 삼척탄광의 영향이었다.
도계초교 학생 수, 1960년대 중반 4천명 넘기도
1940년 개교 당시 73명이던 도계국민학교(현 도계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1955년 1천527명으로 급증했다.
도계국민학교의 학생 수는 1965년에서부터 1970년까지 3천명대를 유지했다.
당시 강원도 내에서 가장 큰 학교였다.
이희탁 중앙진폐재활협회 대표는 "1960년대 중반에는 학생 수가 4천명을 훌쩍 넘겼다"며 "학생이 너무 많아 2부제 수업은 물론 운동회도 하루 1∼3학년과 다음날 4∼6학년으로 나눠서 열었다"고 말했다.
두메산골에 사람이 몰려오자 주거난이 심각해졌다.
대한석탄공사 등 광업소들은 광부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서둘러 사택을 건립했다.
양반사택, 장미사택, 유신사택, 명랑사택 등 탄광 주변마다 사택촌이 형성됐다.
기차를 쇠줄로 끌어 올리던 철암선 인클라인
삼척탄광 개발이 지금의 태백지역까지 확대되면서 태백지역에서 생산한 석탄을 묵호항까지 수송하기 위한 또 하나의 철길이 뚫린다.
1940년 개통한 태백 철암에서 묵호항까지의 철암선이다.
철암선에는 '인클라인'(Incline)이라는 '강삭철도'(鋼索鐵道)가 설치됐다.
태백 통리역∼삼척 심포리역의 급경사 구간을 기차가 운행하려는 방법이었다.
이들 구간의 거리는 1천m 남짓했지만, 표고차는 219m에 달했다.
심포리역에서 통리역까지는 쇠줄로 기차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객차는 너무 무거워서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척에서 태백으로 가려면 심포리역에서 내려 통리역까지 걸어서 가파른 비탈을 올라야 했다.
지그재그 철로, 솔안터널 개통과 함께 역사 속으로
'보릿고개'보다 더 힘든 '통리고개'였다.
매일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통리고개에는 짐꾼, 지게꾼, 야바위꾼, 쓰리꾼(소매치기)에 건달까지 모여들면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노점상, 보따리 장사, 식당, 술집 등도 번성했다.
도계 주민의 수많은 애환을 간직한 '강삭철도 시대'는 1963년 5월 '스위치백'(switchback) 철도가 생기면서 막을 내린다.
스위치백 개통은 경북 영주에서 경북 봉화∼태백 통리∼삼척 도계∼동해를 거처 강릉에 이르는 총연장 193.6㎞에 이르는 산업철도인 영동선의 완성이었다.
기차가 뒤로 달리는 지그재그 철로로 유명했던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철도는 2012년 6월 솔안터널 개통으로 과거 흔적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89년 시작된 석탄산업 합리화로 급격히 쇠퇴
도계는 산업철도의 기차 기적소리와 함께 성장을 계속하면서, 1979년 최대 인구 4만4천543명을 기록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삼척탄광' 도계 영화는 석탄산업 사양화로 급격히 쇠퇴했다.
탄광 구조조정인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시행 첫해인 1989년 한해에만 도계에서는 삼마, 대방, 삼보 등 3개 탄광이 문을 닫았다.
이어 1991년 4개, 1992년 2개, 1996년 1개 등 12개 탄광 중 10개가 폐광했다.
탄광이 문을 닫자 인구도 급감했다.
1989년 3만9천125명이던 도계 인구는 1999년 1만7천444명, 2009년 1만2천445명 등으로 감소했다.
사람 떠나자 '동반자' 철길도 사라지기 시작
인구가 급감하자 도계 역사의 동반자였던 철길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주에서 강릉까지 하루 왕복 4회를 운행하던 영동선 비둘기호 열차가 1998년 11월 30일 마지막 기적을 울렸다.
열차 운행 중단은 역 주변 상권을 무너뜨렸다.
심포, 나한정, 고사리, 하고사리, 마차리, 상정, 미로, 도경 등 삼척지역 8개 간이역이 모두 폐쇄됐다.
간이역 폐쇄는 역 주변 상권 붕괴로 이어졌다.
상권이 무너지자 상인도 한 명 두 명 떠났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으로 붐볐던 '팔도공화국' 도계는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도계 현실 말해주는 까막동네 한적한 골목
빈손으로 온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도계역 앞 까막동네의 한적한 골목이 도계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철길 바로 건너편의 탄광과 저탄장에서 종일 새까만 석탄 가루가 날리던 마을이어서 까막동네라는 이름이 생겼다.
도계역 앞에는 산업전사 안녕 기원비가 있다.
1992년 손수열 도계읍 번영회장이 사비로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해 세웠다.
석탄산업 합리화로 황폐해져 가는 도계 탄광촌의 희망 그리고 광부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도계의 침체는 가속했다.
2000년 10월 10일 철길 막으며 생존권 투쟁
1995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에도 지역경제 붕괴가 계속되자 2000년 10월 10일 도계 주민은 대정부 생존권 투쟁에 나섰다.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중앙갱 폐쇄 계획을 저지하고자 시작한 당시 투쟁은 영동선 철로 점거 사태로까지 확산했지만, 도계의 공동화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김광태 포럼상생 공동대표는 "도계광업소 폐광 계획으로 도계 주민은 제2의 생존권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에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막장을 향해 삶의 빛을 캐던 도계의 광부들은 오늘도 그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절대 쓰러지지 않는 막장 정신은 지금까지 도계탄광촌을 지켜온 힘이다. 그런 막장의 힘이 있는 한 도계는 새로운 역사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이 2005년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탄광촌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쓴 글의 일부다.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산업 유산인 탄광촌 보전해야"
'힘 있는 한 전진할 것'이라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도계광업소마저 2025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도계광업소가 문을 닫으면 도계지역의 탄광은 상덕광업소 단 한 곳만 남는다.
그리고 상덕광업소는 우리나라 석탄산업 역사의 마지막 탄광으로 기록되게 된다.
산업철도의 발전을 석탄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다.
석탄산업의 퇴장으로 운명공동체인 탄광촌 도계의 옛 영광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김태수 한국석탄산업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공동 대표는 6일 "석탄산업은 사라지고 있지만, 철도, 탄광, 사택 등 과거 영화의 흔적인 유산은 남아 있다"며 "역사의 한 페이지인 산업 유산은 소중히 간직해 보존해야 그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by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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