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칼럼] 희망봉과 포르투갈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2024. 1. 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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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서울=뉴스1)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2019년에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통행료를 많이 올렸다. 아덴만 해적들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대륙 남단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아가는 항로가 조금씩 다시 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2023년 이스라엘에서 ’10-7사건‘이 났다.

친이란 예멘 반군인 후티가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선박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군들은 심지어 미 해군 구축함에도 공격을 가했다. 컨테이너 1개당 100달러까지의 위험 할증료를 부과하던 세계의 주요 선사들이 아예 수에즈 항로를 잠정 포기하고 2주까지의 비용이 추가되는 희망봉을 돌아서 선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흔히 희망봉을 아프리카대륙의 최남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있는 케이프반도의 남쪽 끝자락이 희망봉인데 거기서 남동쪽으로 150km 더 항해해 내려가서 아굴라스에 닿아야 아프리카 최남단이 있다.

희망봉은 요란한 관광지로 꾸며놓았을 것 같지만 사진을 보면 그냥 바닷가 87m 높이의 심심한 바위 언덕이다. 아래쪽 해변에 방문객들을 위한 주차장이 있지만 상징적으로 지어놓았을 법한 등대조차 없다. 등대는 동쪽으로 조금 더 가서 케이프반도의 끝에 서 있다.

희망봉과 아굴라스 사이의 해역에서 대서양의 한류와 인도양의 난류가 만난다. 희망봉이 아굴라스보다 더 유명한 이유는 그 지점에서 배가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옛날 뱃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희망봉은 전설의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의 모항이기도 하다. 1488년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처음 보았다. 그래서 희망봉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 십자가 탑이 서 있다. 1497년에 바스쿠 다 가마가 유럽인 최초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다. 포르투갈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다른 항로를 찾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희망봉도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전성기가 끝났다.

포르투갈의 중앙부에 토마르가 있다. 12세기에 템플기사단의 본거지였어서 지금도 인구 약 2만의 작은 도시 전체가 템플기사단의 문장과 기념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기사단이 짓고 사용한 본부와 성당 건물은 잘 보전된 관광 명소다. 전 유럽과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템플기사단이 지은 마지막 건축물 중 하나다. 토마르에는 템플기사단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1312년에 템플기사단이 와해 될 때 디니스 1세 포르투갈 왕이 단원들의 피신처를 마련해주고 그리스도 무장기사단을 만들어 박해에서 피신해 온 단원들을 받아주었다. 그래서 템플기사단의 포르투갈 내 자산이 모두 그리스도 무장기사단에 이전되었는데 훗날 항해왕이라고 불리게 되는 엔히크 왕자(1394~1460)가 기사단장이 되었다. 평생 기사단장이었던 엔히크는 토마르에서 대항해 시대를 여는 지리상의 발견을 성취한다. 디아스, 다 가마 모두 그 후예들이다.

1500년에는 카브랄이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가 풍랑으로 브라질에 닿았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1494년에 스페인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었고 브라질은 경계선(서경 43도 37분)의 동쪽에 위치해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당시에는 브라질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그 너머에는 어떤 땅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브라질은 알래스카를 뺀 미국 영토보다 크다. 덕분에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자웅을 이루는 강대국이 되었다.

포르투갈이 특별히 바다를 개척하는 해양 세력이 되려는 목적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대륙 내부에서 별 존재감도 없었고 대륙 내부를 향해 뭔가를 도모할 힘도 없어서 그냥 바다로 눈을 돌린 것이다. 어쨌든 포르투갈은 15, 16세기를 풍미한 강대국으로서의 역사를 남기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작은 마을 토마르에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1755년의 대지진, 나폴레옹전쟁, 그리고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계기로 기운이 빠졌고 오늘날에 이른다.

세계 곳곳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1974년에 출범한 민주 정부가 하나씩 독립시켰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늦은 편이다. 식민지는 옛날에 가지고 있을 때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유지비용이 만만치 않고 본국의 산업 발달에 오히려 해롭다. 본국의 사회적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1999년에 마지막으로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었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그냥 반환한 것과 대조적으로 포르투갈은 43만 마카오 주민 전원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주었다.

bsta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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