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갈퀴처럼 손 휘두른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 김영환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1. 6. 06: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관립 도쿄음악학교 첫 졸업생…음악회 단골 연주자이면서 하이페츠, 짐발리스트 초청 기획
1931년 12월 잡지 '동광'(제29호)에 실린 김영환 캐리커처.김영환은 얼굴을 건반에 바싹 붙이고 손을 갈퀴처럼 휘두르며 연주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로서는 우리 악단(樂壇)의 길을 열은 사람이다. 조선인으로 동경음악학교 본과를 나온 이가 이 사람 혼자뿐인 줄 기억한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 정식으로 졸업증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한다.’

1931년 월간지 ‘동광’(제22호)은 조선의 음악가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김인식 김형준 이상준 등 서양음악의 개척자들과 함께 홍난파 현제명 김원복 박경호 채동선 안병소 홍성유 계정식 안익태 이인선 안기영 박경희(朴慶姬) 김영의 고봉경 등 성악과 기악을 아울러 신진, 중견을 모두 소개했다.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김영환(1893~1978)은 이 명단 앞줄에 든 주인공이다.

1932년 6월 월간지 ‘삼천리’(제4권제7호)도 ‘인기음악가 언파레-트’ 에서 김영환을 이렇게 소개했다.’조선 사람으로 동경 상야(上野) 음악학교 본과를 졸업하기는 처음이요, 조선 악단에서 피아노로 이이를 지나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인 최초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라는 게 김영환에게 따라다니는 별명이었다.

40대에 접어든 김영환은 원로 취급을 받았다. 음악기관 책임자나 지도자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6년1월4일자

◇조선인 첫 도쿄음악학교 본과 졸업

평양 대지주 집안 출신인 김영환은 1910년 동양음악학교에 들어가 3년간 다녔다. 1913년 도쿄음악학교 선과, 1914년 예과에 이어 이듬해인 1915년 본과에 들어가 1918년 졸업했다. 본과 졸업후인 1918년 피아노 전공으로 연구과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해당하는 전문연주자 과정이다. 본과 졸업 후 우수한 학생만 진학할 수 있기 때문에 김영환의 성적은 뛰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취임했기에 실제로는 다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환이 졸업하던 해, 홍난파가 이 학교 예과에 들어가 1년여 다녔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과 한기주가 중등교사 양성 과정인 갑종 사범과(3년)에 입학한 게 2년 뒤인 1920년이다.

도쿄음악학교는1887년 설립된 일본 유일의 관립 음악학교로 문부성 관할의 근대식 음악전문교육기관이다. 도쿄 우에노 공원 근처에 있어 우에노(上野)음악학교로도 알려져있다. 음악학자 김지선에 따르면, 1913년부터 1941년까지 도쿄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들은 90여명으로 귀국 후 음악계 주역으로 활약했다. 미국, 유럽 유학생보다 훨씬 많다.

◇수료증 거부하고 치른 ‘1인 졸업식’

‘’우에노’는 정말 사립학교와는 질이 달랐다. 연습용 피아노가 한 100대나 되었고 본과의 음악선생은 모두 독일인이었다. 특히 기분이 좋았던 것은 피아노과 학생은 연습때도 그랜드 피아노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이란 것이 두대가 있었고, 본과, 사범과, 선과까지 합쳐 학생 300명에 선생은 130명이나 됐다.’(‘양악백년’ 28쪽)

평양에서 선교사에게 알음알음 오르간을 배웠던 김영환에게 도쿄음악학교는 신세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졸업식때 사달이 났다. ‘1918년3월25일 이날을 나는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다. 당시 관립학교 졸업식엔 문부대신이 직접 나와 일일이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주었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이 나에겐 졸업장을 주지 않고 수료증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압박받는 민족의 설움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대신이 보는 앞에서 나는 수료증을 북북 찢어버리고 이유를 따져들었다.’(‘양악백년’ 44쪽)

김영환은 시험쳐서 당당히 합격해 4년간 공부했는데 졸업장을 주지않으면 학비 등 경비를 전부 돌려주던지, 아니면 문부대신을 상대로 소송하겠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3월30일 김영환 혼자 참석한 졸업식이 다시 열리고, 문부대신이 직접 졸업장을 수여했다.졸업후 총독부 학무국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우리 음악가는 검을 찰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댔다. 무단통치 시대인 당시엔 문관도 검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연희전문에서 제자 길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환은 1918년 연희전문 음악과장(주임)으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 약속은 음악과를 곧 만든다고 했는데, 일제 때는 결국 음악과를 설치하지 못했다. 학교측과 일부 교직원들이 시기 상조라며 반대했기때문이다. 김영환은 일반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3시간씩 기악, 성악, 작곡을 가르쳤다.윤심덕 동생인 바리톤 윤기성, 피아니스트 독고선, 해방 후 서울대총장, 문교부장관을 지낸 최규남, 테너 이인선 등이 그의 지도를 받은 음악부원들이다. 김영환은 사비로 그랜드 피아노를 사서 대강당에 기증하기도 했다. 학교측 기록에는 1923년 당시 2200원이란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나온다.

1세대 음악인인 만큼 연주회도 활발하게 펼쳤다. ‘한때는 소나 말같이 음악회마다 끌려다니더니’(‘동광’ 22호)란 말을 들을 만큼, 음악회마다 김영환 이름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이페츠, 크라이슬러,짐발리스트 같은 해외 유명 연주자들이 일본에 연주하러 오는 틈을 타 경성으로 초청하는 공연기획자 역할까지 했다.

◇'머리, 건반에 대고 손은 공중에 춤추듯’

‘피아노 칠 때에 머리는 건반에 대다시피 손은 공중에 춤추듯 한다.이리하여 재박(再拍)이 쏟아지고야 만다.’

근엄한 용모와 달리, 김영환은 연주할 때는 매우 격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월간지 ‘동광’(제29호,1931년12월)에 실린 캐리커처를 보면, ‘삼천리’ 기사처럼 얼굴을 피아노에 닿을 듯 바짝 붙인 채 손가락을 갈퀴처럼 휘두르는 모습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 자세다.

김영환은 1929년 잡지 ‘별건곤’(제21호,1929년6월)이 기획한 ‘청춘의 자랑 나의 보물’편에서 ‘피아니스트의 보물은 손’이라고 답했다. 손을 아끼기 위해 운동은 ‘핑퐁’(탁구)밖에 못한다면서 늘 손이 부드러워야 하고 민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햇)볕에 그을리면 손 피부가 뻣뻣해지니까 보드랍게 하기 위하야 그러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손이 너무 부드러워도 문제라고 했다. 남녀가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 음이 다른 것은 그 까닭이라는 것이다.

김영환은 서양의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을 몇십만원짜리 보험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지만, 동양에선 아직 음악가의 보물을 알아주는 보험회사가 없다면서 피아니스트에게 손가락은 그만큼 귀중하다고 답했다.

◇'음악 사교가’ ‘연주기관 책임자’

김영환의 연주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뜸해진 듯하다. 1930년 조선음악가협회 창립 때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제는 오히려 음악 사교가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동광’ 제22호)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취직자리나 학교입학의 청을 대도 꽤 잘된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1936년 새해 음악계를 전망하는 기사엔 이렇게 났다. ‘악단의 원로격인 김영환씨는 피아노 연주가로 기대한다는 것보다는 연주기관의 결성이라던가 그 지도같은데 마땅히 힘쓸 책임자로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조건이 구비된 분이다.’(‘활약이 기대되는 樂人군상’, 조선일보 1936년1월4일)

1941년 설립된 조선음악협회 이사 14명 중 함화진 김관 계정식 김원복 김재훈과 평의원 홍난파 김세형 이애내 등과 활동했다. 광복 이후 서양음악 도입 초기 종횡무진 활약한 김영환은 예전 같은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1974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양악백년’에 회고록을 연재한 뒤,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해 1978년 뉴욕에서 별세했다.

◇참고자료

‘청춘의 자랑 나의 보물’, 별건곤 제21호, 1929.6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채규엽, 인기음악가언파레-트, 삼천리 제4권제7호, 1932.6

김영환,양악백년,비온후, 2023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 1985

김지선, 근대시기 일본의 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도쿄음악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41, 2008,12

정운형, 연희전문학교의 음악교육-한국인 교수와 연전음반을 중심으로, 신학논단 제99집, 2020.3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