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중요한가? 나는 그저 모든 과정에서 나일뿐[이진송의 아니 근데]
연말에는 각종 방송사의 시상식으로 북적였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함께 시상식의 의미 또한 달라졌지만, 여전히 어떤 작품과 누가 호명되는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발신한다는 효과가 있다. 2023년 연말 시상식은 ‘나답게’라는 말이 가장 큰 울림을 주었다. 연말 시상식의 조각조각을 모아, 2024년으로 뻗은 길을 비추는 작은 반사경 하나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2023년 11월, Mnet의 시상식 ‘MAMA 어워즈 2023’의 오프닝은 2002년생의 걸출한 래퍼 이영지의 스피치로 시작되었다. <고등래퍼 3>(Mnet)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이영지는 예능에서 활약하다 2022년 <쇼미더머니 11>(Mnet)에서 또 한 번 우승하며 실력을 증명했다. 그러나 인기만큼이나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히트곡이 없다거나, 지나치게 목소리가 크고 우악스럽다거나, 본업이 뭔지 모르겠다거나….
이영지는 MAMA의 무대에 오롯이 서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담담하게 말한다. “왜 그렇게 별났는지, 왜 그렇게 생겼는지. 또 어떻게 그렇게 애매한 재능으로 뭔가를 자꾸 이뤄내고 있는지.” 그리고 대답한다. “나는 그저 모든 과정에서 나였습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2개에서 우승을 하고도, 여전히 ‘애매하다’라는 평가를 받는 현실에서 증명하라는 요구는 밑 빠진 독과 같다.
그것은 언제나 다재다능한 가지의 풍성함보다, 그중 조금 부족해 보이는 줄기에 집중하고, 사람마다 무언가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그저 ‘나 자신’이었다는 이영지의 선언은 애매하고 별나다고 평가받는 것마저 자기 자신으로 수용하는 기개를 보여준다. 물론, 그 이후에 보여준 무대가 압도적이었기에 가능한 연출이었지만.
검열 대상이던 ‘Born This Way’ 이영지·안유진 공연으로 온전히 송출
19년 만에 신인상 탄 신기루…성소수자로서 지상파에서 첫 수상한 풍자
‘나답게’ 살기 힘든 냉혹한 세상의 변화 시작…새로운 내일을 희망한다
MBC 연예대상에서는 ‘연반인’ 재재가 라디오 부문에서 <두 시의 데이트>로 신인상을 받았다. 재재는 SBS의 웹콘텐츠 <문명특급>을 기획, 진행하면서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SBS의 ‘스브스 뉴스’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채널이 독립되었고, 탁월한 진행 능력과 출연자를 존중하는 프로그램의 태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프로그램의 인지도나 화제성에 비해 방송사가 재재 개인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후 프리랜서로 전향하여 MBC에서 라디오 DJ를 시작한 재재는 수상 소감에서 “지금도 본인이 본인 자리가 맞나 고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계실 텐데, (중략) 언젠가 본인에게 맞는 기회가 또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곳’이라는 불안,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두려움과 긴밀하게 연동된다. 아주 잠깐인 영광의 순간, 이것저것 많이 시도하고 다양한 자리를 떠돌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재재는 저성장과 고용 불안정의 시대에 자아까지 챙겨야 하는 지금의 청춘들을 위로했다.
SBS 연예대상에서는 방송인 신기루가 데뷔 19년 만에 신인상을 받았다. 하고 싶은 순간보다 관두고 싶은 순간이 더 많았다는 신기루의 수상 소감은 타인의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 너머에,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어둠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신기루는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집구석에서 댓글만 보면 사람들이 다 날 싫어하는 거 같은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무 좋다고 해주셔서 그 힘으로 또 하루를 버티면서 살았습니다.” 추상적이고 실체가 모호한 악의보다, 구체적인 사랑과 살에 닿는 호의가 진실이며 사람을 살린다. 일반인조차 하루아침에 악플과 마녀사냥에 노출되는 지금,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이 수상 소감은 2023년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전여빈을 떠올리게 한다. 2022년을 관통한 키워드가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였다면, 전여빈은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중꺾그마)이라고 말한다. 꺾이면 안 된다는 단단한 다짐보다, 꺾이고 부러져도 그만두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면 된다는 말이 조금 더 손 닿는 곳에 걸려 있는 듯하다. 이 세상에 꺾이지 않는 삶은 없으니 말이다.
송해나는 SBS 연예대상에서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로 여자 우수상을 받았다. 송해나는 ‘확신의 성장 캐릭터’로, 모델들로 이루어진 팀 FC 구척장신에서 벤치멤버이자 ‘의기소침 식스맨’이었다. 자책골도 넣고 결정적 실책도 기록하며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송해나가, 692일 만에 첫 골을 넣던 순간의 감격과 전율이란. 수상 소감처럼 제일 빨리 그만두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멤버가 “나는 남들보다 정말 부족하구나, 많이 느리구나 생각했었다. 그래도 계속해 나가다 보니까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할 때 주는 울림은 무척 묵직하다.
2023년 MBC 연예대상에는 MTF(Male To Female,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정체화) 트랜스젠더 풍자가 여자신인상을 받았다. 풍자의 여자신인상 수상은 성소수자의 첫 지상파 시상식 수상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였다. 풍자는 트랜스젠더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토크와 먹방 등으로 유명해져서 지상파 예능까지 진출한 경우이다. MTF 트랜스젠더는 과거 방송사와 대중이 하리수라는 인물을 소비했던 양상에서 볼 수 있듯, 과잉된 여성성과 ‘진짜 여자보다 여자 같은’ 육체성을 재현하는 대상으로 물화되곤 했다. 풍자의 거침없는 언행과 먹성은 전통적으로 몸집이 큰 여성 방송인에게 정형화되어 있던 캐릭터이긴 하지만, ‘다른’ 정체성에 대한 혐오와 거부를 넘어 예능인으로서의 면모를 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무적인 변화이다. 다만 MBC 연예대상은 남자 최우수상만 ‘리얼리티’와 ‘쇼·버라이어티’로 나누거나, 남자신인상에만 공동 수상을 안기는 등 남성 출연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줬다는 비판을 받으며 아쉬움을 남겼다.
‘나답게’라는 말은 2024년의 성소수자, 더 나아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주류의 감성에 거슬리지 않아야 하는’ 성소수자에게는 기만적인 말인지도 모르겠다. 2023 KBS 연기대상의 베스트 커플은 김동준&최수종이, MBC 베스트 커플상은 기안84&빠니보틀&덱스가 받았다. 2006년 감우성&이준기(청룡영화상), 2008년 문근영&문채원(SBS 연기대상) 이후 많은 동성 커플(대부분 남남이지만)이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다. 그러나 ‘브로맨스’ ‘워맨스’ 등의 단어를 적극적으로 쓰고 동성 커플이 주는 아슬아슬한 케미스트리를 즐기면서도 현실의 성소수자 차별은 여전히 냉혹하다. 24년 전 홍석천은 한 일간지의 보도 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강제적으로 고백한 후, 오랫동안 방송에 출연할 수 없었다. 그런 그 또한 지난해 7월, 청룡 시리즈 어워즈 남자 예능인상 후보에 올랐다. 홍석천을 MC로서 후보에 올린 작품은 웨이브 예능 <메리 퀴어>. 다양한 퀴어의 삶을 다룬 관찰 예능이다. 홍석천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데뷔 30년 만에 시상식의 후보로 오른 것에 대한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2023년의 마지막 날 MBC 가요대제전에서 볼 수 있었던 무대는 유의미하다. 이영지는 아이브의 멤버 안유진과 ‘End of Time’과 ‘Born This Way’를 선보였다. ‘Born This Way’는 레이디 가가의 세계적인 히트곡이지만, 한국 방송사에서는 검열의 역사가 유구한 노래이다. 방송에 나올 때마다 가사의 특정 부분이 삭제되었다. “No matter gay, straight, or bi, lesbian, transgender life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orn to survive.”
이 가사는 “게이이든, 이성애자이든, 양성애자이든,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늘 방송에서 뭉개졌다. “당신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라틴 아메리카 혈통이든, 동양인이든,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든” 상관없으니 오늘의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라는 부분의 가사가 무탈하게 송출되며 현대인의 미덕인 ‘Love your self’를 강화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런데 이번 무대에서, 이영지와 안유진은 거침없이 무대를 누비며 지금껏 삭제되었던 가사를 노래했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메시지는 비로소 온전하게 송출된다.
2002년, 2003년생이자 한국 가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두 사람의 ‘Born This Way’는 새로운 오늘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불을 지핀다. 아주 잠깐의 낙관에 불과할지라도, 세계적 히트곡을 삭제하지 않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에 모멸감이 들지라도.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 이들이 모아준 용기의 다발들을 안고, 조금 다른 방향으로 뻗은 길을 찾으며 희미한 빛을 비추어 본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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