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국민이 호랑이다
‘나를 넘어서 승리해주세요’는 무리라도 한동훈 짐은 덜어줘야
총선에서 여당은 대통령을, 야당은 당대표를 얼굴로 내세워 심판받는다. 유권자들은 두 얼굴을 비교하여 정권 실적을 떠올리고, 야당이 제시한 비전의 현실성을 평가한다. 이번 총선은 그랬던 과거와 달리 정권 심판인지 야당 심판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래도 대통령 지방 순방과 야당 대표 지역 방문은 사전(事前) 선거 운동 효과를 낳는다.
전국 250개가 넘는 지역구 여야 출마자들이 너나없이 청와대나 중앙당에 ‘한번 내려와주셔야겠다’는 구조(救助) 신호를 보내는 것이 과거 선거 풍경이었다. 인기 있는 대통령이나 호소력 있는 야당 대표가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승패가 뒤바뀌기도 했다. 올 선거에서도 후보자들은 그런 기대로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를 기다릴까. 대통령 지지도는 30% 초반에 멈춰 섰고 야당 대표는 20% 대에 붙박여 있다. 어쩌면 이재명 대표 지원 유세를 마다하는 곳이 나올지 모른다.
대통령 지원이 역(逆)효과를 빚기도 한다. 1967년 6월 박정희 대통령 목포 유세다. 당시는 대통령 유세가 허용됐다. 비세(非勢)인 공화당 후보의 거듭된 요청으로 대통령이 유세 마이크를 잡았으나 공화당 후보는 낙선했다. 이 결과는 지역 정치인 김대중 의원이 전국적 인물로 올라서는 디딤돌이 됐고 몇 년 뒤 박 대통령에게 도전하게 된다.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가 지원 요청을 다 소화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인기 대타(代打)가 그들의 배우자다. 퍼스트레이디는 권력 서열 2인자보다 더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대표가 육영수 여사였다. 국민 마음으로 스며드는 영향력이 대통령을 앞섰다. 언변(言辯)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수수한 한복 차림, 환한 미소, 상대 손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삼위일체를 이뤄 막강 파워를 발휘했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 신세 진 사람이 많았다.
여성 지위 향상에 힘써온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남편이 야당 총재였을 때나 대통령이 된 후에나 한결같이 정치와 거리를 뒀던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도 늘 환영받았다. 남편들 운명은 울퉁불퉁했으나 그 부인에 대한 국민 기억은 아련하고 따스하다.
4ㆍ10 총선까지 이제 95일 남았다. 눈 깜짝하면 선거다. 대통령이 진두지휘할지 아니면 역할을 줄이고 한 발 뒤로 물러설지 알 수 없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역할 크기도 그에 따라 정해진다. 한 위원장에게 얼마나 힘을 실어줄지는 몰라도 짐은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은 섰을 것이다.
테러당한 이재명 대표 거취(去就)는 예측하기 힘들다. 물러나면서도 끈을 놓지 않을 기회로 삼을지, 이번 일을 발판 삼아 지위를 굳히려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이번 총선에서 대통령과 야당 대표 부인 모습이 눈에 띄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과 뒷이야기를 국민은 알고 있다. 남편들보다 더 오래전 더 자주 더 소상히 들었을지 모른다. 이런 일은 없었다. 대통령을 가까이 모셨던 사람들, 야당 대표 주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과 야당 대표 본인 문제다.
국민은 호랑이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어수룩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고, 드세고 사납고 무서운 게 국민이다. 가정이 문제가 되면 대통령 되기 어렵고, 대통령이 돼도 성공하기 힘들고, 대통령에서 물러나도 평안(平安)하지 못했다. 여러 대통령이 자식 때문에, 형님 때문에, 아우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예외’라던 대통령일수록 급소(急所)를 물렸다.
국민은 민주당이 통과시킨 특검법이 81억 국민 세금으로 150명 수사 인력을 동원해 재탕(再湯) 수사를 벌여 선거 기간 내내 대통령 부인을 물어뜯으며 정치 이문(利文)을 챙기려는 정치 연극이란 사실을 뚫어 보고 있다. 그런 국민들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는 뭔가가 빠졌다고 느낀다.
적지 않은 국민이 특검법 대상이 ‘몰래 카메라 사건’인 줄 잘못 알고 있다. 용산 주변 온도(溫度)가 세상 온도는 아니다. 마음의 온도를 알아야 국민 마음을 녹일 수 있다. 한몫 챙기려는 야당이 꽃놀이패를 포기할 리는 없다. 그러나 선거운동은 국민을 보고 하는 것이다. ‘나를 밟고 선거에 이겨주세요’라는 말을 기대하는 게 무리라고 해도 한동훈 위원장 짐을 덜어줄 사과 한마디는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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