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기적
2024. 1. 6. 03:06
기적
마종기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문학과지성사, 2006)
동지(冬至)를 지나니 해가 길어졌습니다. 한동안 우리들의 날은 점점 더 이르게 밝아지고 늦게 어두워질 것입니다. 지극히 온당한 자연의 이치라 하겠지만 요즘 들어 저는 세상의 당연한 일들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멈추거나 재촉하는 법 없이 스스로 정한 속도를 지키는 것들. 며칠 전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어느 소읍에 다녀왔습니다. 역 앞에 홀로 불을 밝히고 있던 한 식당. 입간판에 적힌 ‘아침 됩니다’라는 글자는 이제 빛에 바랬지만 저는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몇 해 전 그 고장에 머물 때 자주 찾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만난 여전한 맛, 그리고 밥을 먹고 있던 낯선 얼굴들. 모두 기적이었습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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