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KGB 위에 나는 CIA, 가짜 기술 흘려 가스관 폭발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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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소련 ‘라인X’ 사건
KGB, 이중 스파이 즉결 처형
더욱이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소련 방문으로 조성된 데탕트 분위기는 라인X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닉슨은 미·소 냉전의 긴장을 완화하는 실천방안의 하나로 과학기술 교류를 제안했다. 라인X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식적인 과학기술교류 채널을 이용하면 서방 첨단기술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상간 과학기술 교류 합의 정신’을 내세워 컴퓨터·반도체 회사 방문에 필요한 미 국방부의 까다로운 승인절차를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미·소 양국이 1975년 데탕트의 상징적 행사로 실시한 역사적인 아폴로·소유즈 우주선 도킹 이벤트는 미국의 우주기술을 수집하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됐다. 미국 당국은 그런 낌새를 눈치챘지만 데탕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눈감아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70년대 라인X팀의 과학기술 정보획득은 공식 교류 채널의 막후에서 과감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라인X팀의 호황은 여기까지였다. CIA가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건네받은 ‘작별문서’를 토대로 KGB의 과학기술정보전에 그야말로 작별을 고할 역(逆) 정보활동을 가동했다. CIA는 서방에 침투한 라인X 요원들을 즉각 추방하지 않고 역이용했다. 정밀하게 위조된 신제품을 만들어 라인X팀을 통해 은밀하게 소련으로 흘러 들어가게 해, 이를 사용한 소련의 산업 및 군수현장이 타격을 받도록 하는 전략이었다. 일종의 트로이목마 작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2년 6월 30일 시베리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폭발사건이다. 당시 CIA는 라인X팀이 가스 파이프라인의 압력을 자동 조절하는 제어 소프트웨어를 구하기 위해 캐나다 업체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CIA가 이 캐나다 업체를 먼저 찾아가 선수를 쳤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스 파이프라인의 이음새와 용접 부분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스 압력을 발생시키는 소프트웨어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라인X팀은 이 제품을 구매해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라인에 투입했다. 이 제품들은 미국의 의도대로 시스템 오작동을 일으켜 대규모 폭발을 일으켰다. 당시 시베리아 가스산업은 소련경제를 떠받치는 중추 산업이었기 때문에 소련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더욱이 이런 사건들이 산업현장에서 빈발하자 소련은 급기야 외국산 신기술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산업현장의 혼란은 불 보듯 뻔했다.
미·중 정보전, 미·소 전례 반복할지 관심
이 즈음 라인X의 블라디미르 베트로프가 KGB에 의해 이중 스파이 행각이 드러나 즉결 처형됐다. 베트로프의 처형으로 종전과 같은 역 정보활동을 더 이상 가동하기 어렵게 되자, CIA는 ‘작별문서’에 적힌 라인X 요원들의 제거작업에 나섰다. 해당 국가들과 협력해 나토는 물론 일본, 태국 등에 침투한 소련 스파이들을 모두 체포하거나 추방시켰다. 라인X팀이 일망타진되자 소련의 산업은 더욱 흔들렸다. 고르바초프 시절 과학기술보좌관을 지낸 랄드 사그디브 교수의 지적처럼, 라인X팀에 의존한 소련의 산업 및 군수업계는 휘청거렸고 그 여파로 소련의 경제, 안보에 서서히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과학기술은 인류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두 말할 나위없이 과학기술은 인류의 공동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정치, 안보, 국익과 만나면 양보없는 경쟁으로 변한다. 미·소간 과학기술 정보전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욱이 오늘날 과학기술은 국가생존이 걸린 첨단무기 개발의 핵심요소로 국가안보의 비책이 되고 있다. 여기에다 미·중 간 패권경쟁과 맞물려 과학기술 정보전은 더욱 심화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작년 5월 일본에서 열린 G7정상회의에 이어 10월 미국에서 개최된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정보동맹체 회의에서 미국과 서방이 중국의 첨단 군사기술 접근을 차단키로 합의한 것이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과학기술 전문스파이 조직을 만든 소련의 결단이나 이를 역이용한 CIA의 역 정보활동은 모두 정보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비책들이었다. 앞으로 미·중이 사활적 과학기술 정보전을 펼치면서 이 같은 전례를 반복할지 또는 새로운 정보전을 펼칠지 자못 궁금하다. CIA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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