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음식 28종 395품목…종가 ‘370년 장맛’의 가르침
이 많은 음식의 법도를 몸으로 익힌 계승자는 기순도(75) 여사다. 대한민국 전통식품명인 제35호(진장 제조 가공)로 지정된 그는 전남 담양의 창평 고씨(제주 고씨 일파) 양진재(養眞齋) 문중 10대 종부다. 종가 장독대 살림을 맡아 올해 쉰두 번째 새해를 맞는다. 1972년 물려받기 시작해 370여년의 맥을 이어가는 세월의 반세기가 되던 2022년에는 장(醬) 문화 전승의 역사적 소명을 생각했다. 음식문화 콘텐츠 전문회사 ㈜다이어리알, 영양학계 원로 이종미(82)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 전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1년을 밤낮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출범한 기순도 발효학교(발효 마스터 과정)가 지난해 10월 14일 개교하면서 1기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매주 토요일 8주 16강으로 구성하고 하루 120분 3교시 수업을 진행한다. 대학 3학점 과목 한 학기 과정과 비슷하다. 입학식 고사와 기순도 장류(석장염·죽염 포함 31품목) 맛보기로 시작한 수업은 장·콩 및 발효음식문화 기초이론을 먼저 공부한다. 학교 운동장만 한 종가 마당에 도열한 1200여개 장 항아리를 사열하는 듯한 자리에 교육장을 마련했다.
양진재 간장은 응용품 제외하고 기본 5종이 있다. ①장물을 분리해 달이지 않고 1년 안에 쓰는 청장 ②장물을 갈라 달인 후 1~3년 묵은 중간장 ③메주를 1년 염지해 장물을 가른 후 씨간장을 첨장하면서 4년 더 숙성해 5년 묵은 진장(명인 지정 품목) ④간장에 메주를 다시 담가 우려 진하게 만든 겹장 ⑤쥐눈이콩 메주로 담근 서목태간장 등이다. 간장으로 간하는 종가음식 264가지에는 재료와 조리법에 맞춰 각기 다른 간장을 쓴다.
수료식 날 점심은 떡국이었다. 그릇을 받은 기 명인은 걱정부터 한다. “아이구 어쩐댜. 능이가 안 들어갔네.” 능이떡국을 준비했는데 주방에서 그걸 빠트리고 떡국을 끓였나 보다. 그런데 수업 과정을 내내 촬영하던 젊은 남자 프로듀서는 감탄을 했다. “외할머니 떡국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떡국이 더 맛있어요.” 옆자리 이종미 교수가 손자 대하는 눈빛으로 설명했다. “간장의 작용이에요. 좋은 간장은 맛의 요소들을 잘 어우러지게 하면서 더 진하게 끌어올리거든요.”
수료식은 눈물바다였다. 반세기 전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처럼 졸업 소감을 말하는 학생도 울고, 그걸 보는 선생님들도 울고. 졸업작품을 일일이 살피면서 기 명인과 이 교수는 감탄과 안도의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순도 장을 이용한 창작음식들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청국장 갈비찜·푸딩·오리테린, 진장 순대·토마토김치, 고추장·간장 약과, 된장 드레싱…일찍이 상상하지 못한 음식들이 쏟아졌다. 음식 전문가들의 의욕적이고 새로운 시도에는 전통장의 전승을 넘어 화려한 부활을 기약하는 기운과 다짐이 꿈틀거렸다.
어머니 장 사업을 총괄하는 아들 고훈국(51) 대표와 진장 기능 전수자인 딸 민견(49)씨도 전통장의 가치 재인식과 세계화라는 어머니 평생 소망을 이룰 발판을 새로 마련한 기쁨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발효학교 모집정원은 10명이고, 제2기 개강은 3월 중에 할 예정이다. 공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한다.
양진재 종가의 창평 고씨 중시조는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1533~1592)이다. 문인이지만 장수로 나서 두 아들과 함께 3부자가 순국했다. 기 명인 종가는 제봉의 차남 학봉 고인후(1561~1592)의 증손인 양진재 고세태(1645~1713)가 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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