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혼란의 주범, 英 권력의 카르텔 옥스퍼드
초엘리트 그룹 탄생·정계 장악 과정
동문들의 심층 인터뷰 통해 파헤쳐
토론 클럽 ‘옥스퍼드 유니언’ 핵심 꼽아
작은 의회처럼 운영하며 토론과 선거
학생들 풍부한 정치 경험과 인맥 쌓아
권력의 아성 넘어 지성의 전당 기대
옥스퍼드 초엘리트/사이먼 쿠퍼/김양욱·최형우 옮김/글항아리/1만8000원
2016년 영국이 국민투표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하자 잔류를 주장하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사임해야 했다. 그의 후임이 된 테레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트,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에 대해 견해를 달리 했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두 영국 최고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다.
바꿔 말해 옥스퍼드는 다섯 명의 총리를 연이어 배출했다. 좀 더 넓혀보면 1940년부터 현재 리시 수낵까지 영국 총리 총 17명 중 13명이 옥스퍼드 출신이며, 옥스퍼드와 함께 영국 양대 명문인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은 한 명도 없다.
신간 ‘옥스퍼드 초엘리트’(원제 Chums(동료), 글항아리)는 영국을 혼란에 빠뜨린 브렉시트를 옥스퍼드가 주도했다면서 “만약 보리스 존슨, 마이클 고브, 도미닉 커밍스 등이 열일곱 살에 옥스퍼드 입학을 거절당했다면 브렉시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반세기 전부터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영국의 초엘리트 그룹이 만들어진 과정과 이들이 어떻게 영국 정계를 장악했는지를 면밀히 파헤친다.
1991∼92년 옥스퍼드 신입생의 49%는 영국 사립학교 출신이며 공립학교는 43%, 나머지는 해외학교 출신이었다. 옥스퍼드에 입학하는 학생은 한 해 3000명 정도로 또래집단의 0.5%도 안되는 수치지만 저자는 옥스퍼드가 영국을 장악했다고 말한다. 미국, 독일, 이탈리아처럼 권력의 중심이 여러 개 존재하는 국가들과 달리 영국에는 이 단일 지배계급만 존재했다.
하지만 1980년대 옥스퍼드는 공부보다는 사교와 인생을 즐기는 것에 몰두했다. 1991년 하버드를 졸업한 후 옥스퍼드에 온 미국인 대학원생 로사 에런라이크는 “대학의 전반적인 기풍은 상당히 반지성적이고 남성적이며 술에 찌들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옥스퍼드 입학만으로도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재학생들은 공부만 하거나 성실한 것을 수치로 여겼다. 저자는 “얕은 지식으로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밥을 벌어 먹고사는 방법을 옥스퍼드에서 너무 잘배웠다”면서 “옥스퍼드 엘리트들은 넓고 얕은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두텁고 흔들리지 않는 자신들만의 권력을 구축해왔다”고 설명한다.
공부는 뒷전이었는데도 옥스퍼드가 그렇게 많은 총리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토론 클럽 ‘옥스퍼드 유니언’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옥스퍼드 유니언은 아예 하원의 토론 규정을 가져와 작은 의회처럼 운영하며 쉬지 않고 토론과 선거를 치렀다. 이튼에서부터 정치의 꿈을 품어온 학생들은 여기서 풍부한 정치 실전 경험을 하고 인맥을 쌓았다. 2020년대 보수당의 정치 스타일은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나온 토론 기법을 기반으로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존슨은 이튼 전교회장을 거쳐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 자리까지 거머쥐며 자신의 롤모델 처칠처럼 대중 연설에서 고전을 활용하는 기술을 연마했다.
전통적으로 보수당 지지 성향이 중심세력이었던 옥스퍼드 유니언에서는 1990년대부터 유럽 내 영국의 위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이 유럽 내에서 하나의 지방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감히 영국의 경제와 정치에 다른 나라가 간섭할 수 없다는 우월감 속에 1990년 12월 ‘영국의 독립을 위한 옥스포드 캠페인’이 결성됐는데, 이것이 브렉시트의 기원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영국의 고위 정치인 대부분은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옥스브리지 출신의 남성들이었다. 영국 상류층의 계급적 희생은 수십 년 동안 기억되며 옥스브리지 엘리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그러부터 20년후 캐머런과 존슨의 세대는 전쟁 같은 비극적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가장 운 좋은 세대이자 철부지로 치부됐다. 1965년 더글러스 흄이 당 대표에서 물러난 후 1980년 대 후반까지 그 어떤 사립학교 출신도 보수당 대표가 되지 못했다.
존슨은 타임스에서 자신의 대부인 역사가 콜린 루카스의 말을 기사에 인용하고서 일주일만에 해고된 후 텔레그래프로 이직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이들이 사립학교와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충분히 연마한데다, 언론은 자신의 브랜드를 발전시키고 정계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캐머런이 당 대표가 되면서 보수당은 40년만에 사립학교 교육을 받은 의원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옥스퍼드 출신이 가진 권력은 때때로 유권자들 짜증나게 만들었지만, 그들이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영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캐머런 이후에도 옥스퍼드 유니언 동문들간 선거가 벌어졌다. 브렉시트를 놓고 갈라졌던 옥스퍼드 동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물심양면 돕느다.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기득권층은 손쉽게 집단 사고의 희생양이 될 위험이 크다.
저자는 “좌우를 불문하고 모든 영국의 기득권층은 이라크 침공의 정당성, 은행의 규제는 약할수록 좋다는 언론의 프레임을 그대로 따랐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도 존슨 같은 옥스퍼드 엘리트가 주도했기 때문에 많은 유권자들이 국가의 미래를 기꺼이 그들의 손에 맡겼다.
브렉시트 찬성하던 내각의 장관들조차 영국이 막대한 이탈 비용을 지불하게 되고, 아일랜드 국경의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면 영국인들은 이동의 자유를 잃고 단일시장에 머물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저자는 “브렉시트는 웬스트민스터라는 그들의 사유지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현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라고 단언한다.
2019년 7월24일 존슨은 1955년 이후 다섯번째 이튼-옥스퍼드 출신 보수당 총리가 됐다. 그는 브렉시트 국민투표부터 보수당 대표 경선, 그리고 총선까지 3년만에 세 번의 승리를 연달에 손에 쥐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처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를 전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선포했는데도 국경을 봉쇄하지 않고 버티면서 영국은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그리고 평범한 영국인이 집에 갇혀 있는 동안 존슨과 정치인들은 총리관저에서 퍼티를 벌였다. 이른바 ‘파티게이트’다.
지금의 옥스퍼드는 브렉시트를 탄생시킨 장본인으로서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대학 당국은 입학전형을 개편하기 시작했고 2017∼21년 공립학교 출신의 비율은 58.2%에서 68.2%로, 여학생 비율은 50.0%에서 55.2%로 각각 증가했다. 이튼 출신은 2014년 99명에서 2021년 48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옥스퍼드가 시도하는개혁을 모두 성공시킨다 해도 이 학교는 여전히 영국 권력층의 중추로 남을 것이다.
저자는 2022년 1월 에마뉘엘 마크롱을 포함한 4명의 프랑스 대통령과 2명의 총리를 배출한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 대학원인 국립행정학교(에냐)가 폐교된 것을 사례로 들며 옥스퍼드가 학부과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부를 폐지하면 옥스퍼드도 연구에 전적으로 집중하며 대학원생을 가르쳐 과학기술 기업을 창업하고 기업 회의와 임원 교육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서울대 폐지론자들의 주장과 비슷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옥스브리지가 소외당한 영국의 일반인들을 더 많이 교육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과연 옥스퍼드가 수백 년간 지켜온 권력의 아성을 포기하고 국민을 위한 지성의 전당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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