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새해의 무지개 다이어리

2024. 1. 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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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파랑·노랑… 기념일 메모
무한긍정 에너지로 새해 시작
감정 표현하는 색은 삶과 긴밀
‘무지개 치료법’ 정신건강 도움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새로운 다이어리 하나를 장만하는 것 아닐까. 딱히 계획형 인간이 아니더라도 플래너 하나쯤은 구입하고 한 해의 일정을 기록한다. 가족의 생일과 기일을 적고 중요한 기념일을 메모한다. 색색의 색연필을 꺼내놓고 눈에 띄게 표시도 한다. 막내의 생일은 빨간색, 둘째는 노란색, 큰애는 파란색으로 그 하루의 빈칸을 색칠해서 메워놓는다. 새해의 플래너가 순식간에 알록달록 화려해진다. 이렇게 색칠해 두면 한 해가 왠지 밝고 환하게 전개될 것 같은 에너지를 얻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색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기도 한다. 환자들에게 일일 활동표를 나눠주고 밥을 먹거나 약을 먹고 또는 잠을 자는 시간은 까만색으로 색칠하게 하고 나머지 활동은 화려한 색으로 표시하라고 지시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대부분 환자의 활동표가 처음에는 무채색으로만 채워지다가 점점 빨갛고 노랗고 파란 무지개 색깔로 바뀌어간다. 환자들의 삶의 패턴이 무채색에서 무지개색으로 바뀐다는 것은 삶의 의미가 환기되는 것이고 정신 건강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부산 동아대학교 정신과 전문의인 김철권 교수는 이것을 무지개 치료법이라 하여 환자들의 생활에 활기를 넣어주면서 의사로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천수호 시인
색은 이렇듯 우리 삶의 질과 긴밀한 영향을 가진다. 색채의 마술사인 마르크 샤갈은 ‘그림’이라는 시에서 “나의 태양이 밤에도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색채에 물들어 잠을 자겠네”라고 하며, 풍부한 색채를 통해 삶의 가능성과 생의 즐거움을 느끼고 또 표현했다. 요즘 서초동 흰물결갤러리에서는 이런 색상의 유쾌함을 즐길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 화가인 데스 브로피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전시회다. 그의 작품은 익살스럽고 리듬감이 있다. 사람들의 흔한 일상을 담았는데 그들의 과잉된 제스처가 즐거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 작품에는 색상이 주는 유쾌함도 크다.

‘신나게 춤을’이라는 작품은 세 여인이 빗속에서 춤추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번쩍 쳐든 빨간 우산과 펄럭이는 빨간 재킷, 어깨를 짜고 춤을 추는 노란 재킷과 청록 재킷의 두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의 어깨를 저절로 들썩이게 한다. 색채의 온도감까지 적절히 반영한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데스 브로피 작품의 따뜻함과 즐거움은 색채 에너지가 한몫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역시 색이란 것이 태양의 힘을 흡수한 빛 파장의 결정이라는 것도 실감한다.

색의 힘은 치매 치료에도 효과적이라고 한다. 치매가 진행 중인 올해 아흔둘이신 어머니께 색 에너지를 활용해 보려 한다. 방학 동안이라도 어머니 곁에서 24시간을 함께하기로 작정하면서 준비하는 내 손은 바빠졌다. 그동안 어머니께 얼마나 소홀했는가 하는 자책이 클수록 준비할 것은 많아졌다. 분홍색은 우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고 하니 창문의 커튼은 분홍색이 안성맞춤이겠다. 빨간색은 식욕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하여 빨간색 식탁 매트를 몇 개 주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매 환자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인식할 수 있는 색깔이 초록색이며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하여 내가 입을 초록색 티셔츠를 구입했다. 또한 알록달록한 색깔이 환자에게 좋다고 해서 시선이 닿는 곳에 화병을 두어 평소 좋아하던 꽃을 꽂아둔다.

이것은 순전히 이 시간이 지나면 감당할 수 없게 될 죄책감을, 미리 조금 수습하는 벼락치기 시험공부 같은 것이다. 그래도 잠만 자다가 시험장으로 가는 것보다야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위안이다. 어머니와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고 또 노래도 함께 부른다. 왜 어머니가 끝까지 아는 노래는 딱 하나뿐일까. 그 노래는 왜 하필 가사가 슬픈 클레멘타인일까, 하면서도 어머니가 아주 귀하게 웃는 시간에는 빨간색을 칠한다. 어머니 미소의 강도에 따라 정해둔 무지개 색깔을 칠하다 보면 이달 말일쯤이면 무채색이었던 어머니의 생활 그래프가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색으로 바뀌지 않을까.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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