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선 피해자들…“억울한 우리 딸, 사망신고도 못 했어” [취재후]
14명의 사상자를 낸 분당 백화점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재판 결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름에 일어난 사고, 현장에는 어느덧 눈이 쌓였습니다. 그곳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 "매일 아침 아내 목소리 들으며 일어나"
최원종이 몰던 차에 치인 고 이희남 씨의 남편, 부부가 주거니 받거니 정답게 부르던 노래를 휴대전화 알람으로 설정해뒀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했던 첫사랑,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갑니다.
할머니가 여행을 떠난 줄로만 알고 있는 이 씨의 손녀는 "할미 어디 갔어? 나도 비행기 타고 할미 보러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 "재판 결과 나오기 전까진 사망신고 못 해"
또 다른 피해자 고 김혜빈 씨, 스무 살 외동딸이었습니다.
김 씨의 부모는 딸이 있는 추모공원에 매일 가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딸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아버지, 아직까지 딸의 사망신고도 못 했습니다.
"사고 당사자로서의 딸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사망 신고를 못 했습니다. 재판의 결과물이 안 나온 상태에서는 딸을 보낼 수 없습니다. 판결이 날 때까지 신고를 미룰 생각입니다."
- 고 김혜빈 씨 아버지, 인터뷰 중
■ "아내의 베개를 안고 잠을 잡니다"…결혼기념일 다음 날 재판에 나온 남편
어제(4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열린 최원종의 재판에는 유족들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고 이희남 씨의 남편은 "1월 3일은 제 아내와의 39번째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참담합니다."라고 말하며 입을 뗐습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첫사랑 아내를 잃었습니다. 30년을 매일 걸어 다닌 길입니다. 아내와 외식하려고 손잡고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차량이 빠르게 돌진했습니다. 한순간에 아내는 피를 흘리고 의식불능 상태로 쓰러졌습니다. 제가 죽고 아내가 살아야지요…."
"옆에 같이 손잡고 자던 아내가 없어, 아내의 베개를 안고 잠을 잡니다. 같이 있으면서 제가 착한 아내 지켜주지 못한게 너무 미안하고 너무 한이 됩니다."
- 고 이희남 씨 남편, 법정 증언 중
■ 딸이 좋아한 과 잠바 입고 증인으로 나선 아버지
고 김혜빈 씨의 아버지도 증언에 나섰습니다. 딸이 생전에 입고 싶어하던 대학교 '과 잠바'를 입고 증인석에 앉았습니다.
증언 내내 방청석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혜빈이는 그림을 좋아해서 미대에 지원했고, 건국대학교 영상영화과에 들어가기 위해 어렵게 재수까지 하며 노력한 결과 2023년 합격했습니다. 행복해하던 혜빈이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혜빈이가 떠난 날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장례 치르는 동안 하늘도 슬프게 울었습니다. 입관 날, 그토록 좋아했던, 제가 지금 입고 있는 과 잠바를 수의로 입혔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 유학 보내는 심정으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잠자는 모습을 보니, 늦잠을 잤다며 갑자기 헐레벌떡 일어나 씻고 화장을 하고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에 늦었으니 아빠 찬스를 써야겠다며 김 기사를 호출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인하는 날,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치고 하늘은 맑았습니다."
- 고 김혜빈 씨 아버지, 법정 증언 중
최원종은 증인들과 분리된 공간에서 원격으로 증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김 씨의 아버지, 피고인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발언으로 최원종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피의자 최원종은 과거에 부모가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자, 부모도 자신이 주장하는 스토킹 조직에 매수됐다 생각해 진료를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에서 본인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스토킹 조직원(부모)을 범행 대상으로 삼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직원인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았던,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범행한 건 그냥 본인의 욕구불만을 사회에 풀려는 게 아니었나 궁금합니다. 피의자 최원종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면 반드시 끝까지 처벌받는다는 걸 깨닫기를 바랍니다. 다음 생에는 꼭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랍니다."
- 고 김혜빈 씨 아버지, 법정 증언 중
최원종은 과거 경찰 조사에서 "스토킹 집단이 나를 해하려고 해 이를 알리고자 범행했다. 흉기에 맞은 피해자 중에 그 집단에 속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스크를 쓴 채 증언을 듣던 최원종은 재판 내내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 최원종 정신감정 결과, "범행 당시 심신미약"
지난해 10월 열린 2차 공판에서 최원종 측은 범행을 모두 인정했지만, 조현병이 의심돼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며 정신감정을 신청했습니다.
이번 재판에서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립법무병원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범행 당시 피고인은 사물 변별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저하된 심신미약 상태였다. 적절한 치료가 없으면 망상을 일으키는 조현병이 지속 될 수 있으므로 재범 위험성이 커 치료감호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검찰은 정신감정 결과에 대해 기존 주장대로 "범행 당시 피고인은 심신미약 상태가 아니었다"며, "감정 결과는 참고사항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저는 정신감정이 판결에 영향을 안 미치는 게 맞다고 봐요. 심신미약이라고 해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변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저희 어머님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정신병이라는 게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니잖아요. 치료를 받을 건 받지만, 그걸로 인해서 범죄를 저질렀던 사실의 본질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해요. 벌은 벌대로 받는 게 맞다고 봅니다."
- 고 이희남 씨 사위, 인터뷰 중
■ 최원종 부모 "사죄하고 싶다" … 유족 "진정성 안 느껴져"
재판이 끝난 후, 최원종의 부모는 유족들을 찾아갔습니다.
이들은 사죄를 드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피해 당사자들을 찾아가려 했지만, 법원 등에서 '2차 가해가 될 수 있고, 감형을 위한 노력으로 비춰질 수 있다'며 피해자들의 연락처 제공을 거부했다고 말했습니다.
섣불리 취재진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유족들에게 더 해가 될 수 있다며, 공식 인터뷰도 거절했습니다.
유족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최원종) 부모의 집이 저희 어머니가 치료받으셨던 병원이나 장례식장, 두 군데 다 2~3km밖에 차이가 안 날 거예요. 차로 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 근데 단 한 번의 사과도 없었어요."
- 고 이희남 씨 사위, 인터뷰 중
"사과하겠다는 의도에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과도 때가 있는 거거든요. 한참 지났는데 인제 와서 하는 사과가 의미가 있을까요? 재판 결과만 기다릴 뿐입니다."
- 고 김혜빈 씨 아버지, 재판 후 인터뷰 중
고 김혜빈 씨의 아버지는 재판이 끝나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재판 일주일 전부터는 몸에 반응이 와요. 소화도 잘 안 되고, 잠도 안 오고…. 판결이 빨리 나와서 재판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최원종에 대한 다음 공판은 오는 18일 열립니다.
[연관 기사] “최원종 판결날, 딸 사망 신고 할 것”…그 시간에 멈춰 있는 사람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54819
촬영기자: 정준희
영상편집: 강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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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기자 (212@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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