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시점·방식 모두 이례적…윤 대통령 거부권 속전속결 이유는 뭘까[깊이보기]
윤석열 대통령의 5일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는 앞선 세 차례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 가족 비리 의혹 특검 법안에 거부권을 활용한 데다 형식적인 숙려 기간도 생략돼 거부권의 대상과 시점, 방식을 두고 적절성 논란이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속전속결 대응에는 총선을 앞두고 야당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뜻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이날 쌍특검 법안(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안과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안)에 이의를 제기하며 국회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자신의 가족 비리 의혹을 방어하는데 최후의 입법부 견제 수단인 거부권을 활용하는 선례를 남겼다. 윤 대통령이 그간 국회로 돌려보낸 안건들은 여야가 첨예하게 다퉈온 법률 재·개정안이었다.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은 윤 대통령의 재가 직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대통령은 헌법과 법치주의의 수호자로서 인권 보호 등 헌법 가치를 보호하고,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책무가 있다”며 “따라서 이러한 원칙에 반하는 특검 법안에 대해서는 재의요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거부권 행사 사유를 밝혔다. 이 실장은 그러면서 쌍특검법안을 “총선용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하는 “총선용 악법”으로 규정했다. 비서실장이 나서 거부권 행사 사유를 밝힌 건 처음이다.
이슈 지속기간 단축 겨냥한 속전속결
대통령실이 속전속결식 강경 대응에 나선 데는 총선 전 야당 주도의 ‘특검 정국’ 조성을 막겠다는 뜻이 담겼다. 대통령실은 쌍특검 법안을 정치적 목적이 깔린 야당의 총선용 포석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검 후보 추천에서 여당(대통령이 소속되거나 소속되었던 원내교섭단체)을 제외한 점, 피의사실 외 수사과정 브리핑을 열어둔 점이 총선 국면에서 ‘악용’될 수 있다고 본다.
‘반헌법적’이라는 논리를 펴지만 이전 사례들에 비춰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야당은 지적한다. 앞서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연루된 ‘드루킹 댓글조작 특검법’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의혹을 다룬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법’에서도 각각 집권 여당인 민주당과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의 특검 추천권이 배제된 바 있다. 브리핑 조항은 최서원 특검법 등 여러 특검법에도 포함됐던 것이다.
결국 대통령실의 강경 대응에는 총선 전 불리한 이슈의 지속 기간을 단축하려는 뜻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야당에 화살을 돌리면서 수세적 입장을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뜻도 읽힌다.
김 여사 특검법안은 총선을 앞두고 대표적인 여권의 위험요소로 꼽혀 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특검에 찬성하고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는 여론이 과반을 차지하는 등 부정적 여론이 강했다. 윤 대통령이 배우자 관련 의혹에 대한 특검을 거부한 모양새가 되면서, 정치적 화두로 삼아온 ‘공정’ ‘법치’ 등의 가치도 훼손이 불가피해졌다.
여권은 이같은 여론의 부담을 지더라도 ‘정부 이송→거부권→국회 재표결’로 이어지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이 국회로 돌려보낸 법률안이 다시 의결되려면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이탈표가 나오지 않으면 폐기 수순을 밟는다. 폐기된 법안은 정국 핵심에서도 밀려나는 상황이 그간 반복돼 왔다.
재표결에서 여당의 이탈표를 방지하려는 수 싸움도 반영됐다. 재표결 시점이 늦춰질수록 여권의 이탈표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판단하고 있다. 재표결이 총선 공천 시점에 치러지면 여당의 공천 탈락자 중 이탈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은 9일로 예정된 본회의에서 즉각 재표결하는 안을 주장하지만, 민주당은 윤 대통령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검토하며 표결 시점을 늦추는 안을 추진 중이다.
형식적 ‘숙고’ 시간 생략, 행사 방식도 이례적
윤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이번 거부권 행사 시점은 유례없이 빨랐고, 행사 방식도 이례적이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쌍특검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즉시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을 통해 ‘즉각 거부권 행사’ 방침을 밝혔다. ‘숙고하겠다’는 원칙적 입장도 담기지 않았다. 이어 국회가 정부로 이송한 지 하루 만에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재가했다.
앞선 거부권 행사 때는 ‘정부 이송 뒤 15일 이내’라는 법적 시한 내에서 숙고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첫 사례였던 양곡법 개정안은 정부 이송 나흘만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간호법 제정안은 정부 이송 12일만,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개정안은 14일만에 거부권을 재가하며 법적 시한을 점차 채웠다. 거부권 행사로 가닥을 잡더라도 이 기간 공식적으로 못 박진 않았다. 대신 ‘폭넓게 의견을 듣고 숙의해서 결정하겠다’며 형식상의 숙고 시간을 거쳤다. 여당 건의도 거부권 행사 불가피 기류를 형성하는 한 단계로 활용해 왔다.
윤 대통령의 ‘즉각 거부’ 의지를 이행하는데 국무회의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도 노출했다. 지난 2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새해 첫 국무회의는 이례적으로 오전에서 오후로 시간을 미뤄 열었다. 쌍특검법 정부 이송에 대비한 시간 조정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정부 이송이 4일에 이뤄지자 이날 다시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국무회의 의결정족수(15명)에 맞춰 국무위원들이 쌍특검 법안 거부권을 ‘원포인트’ 안건으로 두고 사흘만에 다시 모였다. 매주 화요일 열리는 정례 국무회의는 오는 9일로 예정돼 있다. 새해 두번째 정례 국무회의 역시 정부 이송 닷새째로 거부권 법정 시한 내다. 이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회의를 소집한 데는 윤 대통령의 ‘즉각 거부’ 지시 이행이 주된 이유로 풀이된다.
거부권 행사 이유를 밝히는 방식은 간접화하고 있다. 1·2호 거부권 행사 때는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직접 이유를 설명했다. 3호 거부권 때와 4호인 이번에는 한 총리 주재 회의에서 의결된 안을 재가하는 형식을 취했다. 대신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이 비서실장이 나서 사유를 설명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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