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모여 살던 ‘시내마을’을 아시나요? [옛날잡지]
<옛날잡지>는 늘 시대 흐름 속에서 잊힌 역사의 한 토막을 끄집어냅니다. 오늘은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이 가득한 <마지막 내시마을>이라는 제목의 1983년도 12월호 레이디경향 기사를 펴봤습니다.
내시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사극 속 코미디적 요소를 담당하는 감초 역할들이 생각나지 않으신가요? 대부분의 미디어 속 내시는 생식 능력이 없는 남자를 비하하는 단어로 통용되어 오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옛날잡지>에서는 소설가 출신 김정례 필자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있던 ‘내시 마을’을 찾아가 조선 시대가 저문 후 내시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곳에서 일명 ‘내시댁’이라고 불리는 내시의 아내, 양씨 할머니의 인생사를 들어보며 ‘내시 아내로서의 삶’, ‘설 곳이 없어진 그들의 처지’ 등으로 아픔과 고뇌가 얽힌 역사의 가닥을 한 올 한 올 풀어냈습니다.
17세 꽃다운 나이, 28세 신랑과 결혼. 내시라는 건 알았지만 상처한 후처 자리라는 것은 몰랐다는 양 할머니… 상처한 내시가 후처까지 들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아내는 노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누렸던 권세만큼이나 찾아오는 손님도 많으니 양 할머니는 손님 접대하느라 부엌에서만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권력의 한가운데 있던 내시는 어떤 이유로 생겨났을까요? 이번 유튜브 촬영을 위해 고전 영화 <내시>를 ‘정주행’하고 온 <옛날잡지> X언니가 전합니다.
고려 초 내시의 원래 뜻은 궁중 숙위(宮中宿衛)와 근시(近侍)를 맡은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이었고 높게는 차관급이었으니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 자제들이 맡아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종 때 원나라 사신을 보내면서 육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보내면서 내시가 생식 능력을 잃은 남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라는 역사 학설이 있습니다. 내시 자체가 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즉 양 할머니가 내시의 후처로 시집간 이유는 당시 그들의 권세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부인의 출입이 극히 통제된 궁중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는 특권과 왕비의 침전까지 출입이 자유로운 그들은 알게 모르게 정사에 깊이 끼어드는 경우가 허다했고 연산군 때 이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고 하지요.
내시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내시를 ‘나리’, ‘선달님’으로 깍듯이 높여 불렀고 그들의 아낙도 존중하는 마을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옛날잡지>에서는 후사가 없어 남성성이 없는 혹은 ‘없앤’ 양자를 입양해 양 할머니의 증조, 조부, 남편의 성이 각기 달랐다는 이야기와 내시가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영화로움은 사라지고 팍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상황을 양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으로 따라가 봅니다.
개인의 인생 이야기로 역사와 시대를 읽어내려갈 수 있는 <옛날잡지>(클릭), 내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유튜브 채널 <옛날 잡지>를 주목해주세요. 구독하면 현재 시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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