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녹는 눈사람과 녹지 않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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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무렵 그 특별한 시간을 축하하듯 하늘에서 눈이 펄펄 쏟아졌다.
새하얀 눈사람은 언제든 흙과 발자국으로 더럽혀질 수 있고, 날이 따뜻해지면 진창으로 바뀌기 일쑤지만, 그 누추하고 허름해질 위험 속에서도 눈사람엔 함박눈처럼 펄펄 쏟아지던 기쁨의 순간이 있었다.
사람이건 눈사람이건 녹아 사라지지 않는 건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흐르던 기쁨과 온기의 기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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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만든 눈사람을 만나다
사람도 언제가는 사라지지만
기쁨과 온기의 기억은 남는다
해가 바뀔 무렵 그 특별한 시간을 축하하듯 하늘에서 눈이 펄펄 쏟아졌다. 눈밭이 된 거리로 나가 누군가 빚어놓은 개성 있는 눈사람을 만났다. 어떤 눈사람은 심술이 난 것처럼 바늘잎으로 만든 눈썹이 브이 자로 솟아 있고, 어떤 눈사람은 뾰족한 솔방울 코와 가슴팍에 박아넣은 조약돌 단추로 정성스러운 만듦새와 함께 친근하게 서 있었다.
제일 처음 눈사람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소복이 쌓인 눈을 뭉치고 굴려 몸통을 만들고 그 위에 머리를 얹은 사람. 눈사람 캐릭터가 등장하는 다양한 매체를 접했으니 우리에겐 그 형태가 익숙하지만, 제일 처음 눈사람을 만든 이는 아마도 창조적 모험을 감행했을 것이다. 우선 크게 굴려보자. 둥그렇게 다듬고 탑처럼 쌓아보자. 어쩌면 그 최초의 조각가는 무언가를 완성한다는 목적보다 그저 눈을 만지고 단단하게 뭉치는 게 좋아 맘껏 즐기다 보니 그 과정이 '눈사람'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쓸모와 관계없이 돌과 흙 그리고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이니 말이다. 프랑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삶을 담은 영화 '까미유 끌로델'에는 정신병원에 갇힌 클로델이 병원 앞 뜰로 달려가 별안간 참을 수 없다는 듯 땅의 진흙을 한 움큼 뭉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이에겐 손으로 접촉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없으면 살 수 없는 삶의 필수조건이라는 걸 나는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형태를 만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마음은 어쩌면 일정한 둘레도, 부피도 없는 우리의 내면을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물질로 표현하고픈 소망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밤새 소나기눈이 내린 날, 외출했다 돌아온 나의 연인이 거리에서 마주친 어느 커플의 모습처럼.
"어떤 남자가 손바닥에 작은 눈사람을 얹고 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툭 떨어졌어."
연인은 마치 지금 자기의 손바닥 위에 꼬마 눈사람을 얹은 듯 실감 나게 말했다.
"그러니까 옆에서 걷던 여자가 '어머, 오빠!'하고 소리치는 거야. 그랬더니 남자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랬는데?"
"손이… 너무 시려…."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애써 만든 눈사람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도무지 차가워 견딜 수 없는 또 다른 마음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언젠가 내가 만든 눈사람을 보고 엄마가 깜짝 놀라며 '이렇게 예쁜데 녹으면 어쩌니? 냉장고에라도 넣어줄까?'라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민들레 와인'에는 2월의 눈보라 속에서 눈송이 하나를 빈 성냥갑에 담아서 재빨리 얼음 창고에 넣어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여름의 어느 날, 그 아이는 자기의 형에게 지금 일리노이주에서 눈송이를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며 한껏 뿌듯해한다. 그 장면을 읽고 나는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우리의 삶에서 녹아 사라지지 않게 보호하고 지켜야 할 귀한 눈송이는 무엇일까.
눈사람과 사람의 공통점은 언젠가는 녹아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눈송이가 뭉쳐져 얼마간 눈사람이란 형상으로 존재하듯, 사람도 우주를 순환하는 몇 종류의 원소가 합해져 유한한 시간 동안 '나'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새하얀 눈사람은 언제든 흙과 발자국으로 더럽혀질 수 있고, 날이 따뜻해지면 진창으로 바뀌기 일쑤지만, 그 누추하고 허름해질 위험 속에서도 눈사람엔 함박눈처럼 펄펄 쏟아지던 기쁨의 순간이 있었다. 사람이건 눈사람이건 녹아 사라지지 않는 건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흐르던 기쁨과 온기의 기억이 아닐까.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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