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보수진영은 ‘진보의 상징’ 하버드 총장을 어떻게 몰아냈나

이철민 기자 2024. 1. 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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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언론인 크리스토퍼 루포,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 집요하게 파헤쳐
공화당의 ‘정치 공격’, 억만장자들의 ‘기부금’ 압박, 기자들 3박자 공격 “성공”

지난달 미 의회 청문회에서 학내의 수많은 반(反)유대인ㆍ이스라엘 시위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답해, 미 보수파의 강력한 사퇴 압력을 받았던 클로딘 게이 총장(53)이 결국 지난 2일 사임했다.

게이 총장은 작년 12월 5일 하원 청문회에서 엘리스 스테파닉 하원의원의 “유대인 학살을 요구하는 시위가 대학의 위협ㆍ괴롭힘 관련 강령을 위반한 것이냐, 아니냐”는 ‘예스/노’를 묻는 질문에 “상황(context)에 달렸다”며 확실한 답변을 피해 보수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동시에 억만장자 빌 애크먼은 초고액 하버드대 기부자들을 동원해 10억 달러의 기부금을 유보하며 하버드대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 게이의 사임을 압박했다.

하지만 게이는 버텼고, 하버드대 법인 이사회는 12월 12일 만장일치로 “게이를 재신임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런 게이를 물러나게 한 것은 미 학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표절(plagiarism) 의혹’이었다. 그러나 게이(정치학 및 미 흑인 연구 전공)의 표절 의혹은 동료 학자들이나 학계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보수파 언론인이자 행동가인 크리스토퍼 루포(Rufoㆍ39)의 집요한 파헤치기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하원의원도, 억만장자도 아니어서, 미국 밖에선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하버드대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을 집요하게 파헤쳐 그의 사퇴를 초래한 미 보수파의 1등 공신인 언론인이자 활동가인 크리스토퍼 루포/맨해튼 인스티튜트

루포를 비롯한 미 보수 매체의 언론인들은 최초로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을 터뜨렸고, 하버드대가 자체 조사에서 “학문적 부정행위(misconduct)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계속 추가 표절 의혹 사례를 발굴해 소셜미디어와 보수 매체에 퍼뜨렸다.

뉴욕타임스와 CNN 방송과 같은, 미 보수파가 ‘리버럴 매체’로 분류하는 주류 매체들은 게이의 표절 의혹이 시간이 지나면서 덮일 줄 알고 처음엔 잠잠했다. 그러나 루포와 그의 ‘언론인 일당’이 추가로 터뜨린 표절 의혹 건수는 40건을 넘어섰다.

결국 게이와 표절은 서로 뗄 수 없는 단어가 됐고, 6개월 전 하버드대 총장 취임 때 “학자들의 학자”로 불렸던 게이는 주류 매체에서도 “학문적 성취는 빈약한” 학자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시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맨해튼 인스티튜트의 연구원ㆍ언론인이자 보수파 행동가인 크리스토퍼 루포는 게이 총장이 사임하자 소셜미디어에 X에 “두피를 벗겨냈다(scalped)”는 표현을 쓰며, 미국 좌파가 장악한 엘리트 대학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의사를 밝혔다. ‘스캘핑(scalping)’은 고대 전쟁에서 살해한 적의 머리 가죽 일부를 벗겨내는 야만적 행위를 말한다.

루포와 미국 보수파의 다음 타깃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다양성(diversity)ㆍ공평(equity)ㆍ포용(inclusion)을 중시한다고 보는 미국 기업과 교육기관의 이른 바 DEI 정책이다.

루포는 지난 3일 정치매체 폴리티코 인터뷰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을 통해 “미국의 모든 기관에서 DEI를 제거하기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며 “아이비리그(미 동부의 명문 8개 대학)에서 썩은 것을 드러내고, 인종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를 학문의 최고 원칙으로 회복하기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루포,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 처음 제기

루포는 미 진보 진영에 만연한 ‘비판적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와 싸우는 보수 행동가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CRT로 표현되는 비판적인종이론은 미국의 역사ㆍ사회구조ㆍ법체계ㆍ문화 질서는 모두 유색인종 특히 흑인의 희생을 기초로 해서 세워졌고, 지금도 그들에게 계속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또 젠더 이데올로기는 선천적인 양성(兩性) 개념을 거부하고 다양한 성(性)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논리를 비판하려고 미국 보수진영이 만든 용어다.

루포는 하버드대 이사회가 게이 총장을 재신임한 이래 3주 간 그의 표절을 물고 늘어졌다. “미국 학계에선 학자의 경력을 파괴할 수 있는 ‘대죄(cardinal sin)’로 여기는 사안(AP 통신)”이었다.

루포와 동료인 보수매체 ‘아메리칸 컨서버티브’ 기자 크리스토퍼 브루넷(56)은 작년 12월10일 처음 2001~2007년 게이 총장이 발표한 논문 2건에서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크리스토퍼 루포와 함께, 작년 12월10일 하버드대 총장 클로딘 게이의 과거 논문 표절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크리스토퍼 브루넷/X

하버드대는 압력에 못 이겨 게이 총장의 이들 논문에서 발견되는 일부 “중복되는 표현들(duplicative language)”들을 조사했지만 “의도적이거나 무분별한 것으로 판단되지 않으며, 학문적 부정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다. 게이는 이 논문들에 대한 수정 요청 서한을 보냈고,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루포 일당의 ‘게이 사냥’은 집요했다. 학계가 ‘이게 표절이냐 아니냐’를 놓고 망설일 때에, 루포 일당은 게이 총장의 논문들에선 이렇게 자의적으로 ‘차용한 표현’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계속 폭로했다.

미국 보수 매체인 워싱턴 프리 비콘의 Z 세대 기자인 아론 시베리엄/폴리티코

루포와 브루넷, 보수 매체인 ‘워싱턴 프리비콘(Free Beacon)’의 젊은 기자 아론 시베리엄(28)은 게이 총장이 사임하기 전날인 1월 1일까지 게이가 타인의 논문 문구를 조금씩 바꿔 표현한 것까지 40개 넘는 의혹 건수를 발견해 소셜미디어와 보수 매체에 퍼뜨렸다. 미국 학부생이라면 피하도록 훈련 받는, 인용 상 표절에 해당되는 문장들이었다. 마침 표절 의혹을 발견하는 고성능 소프트웨어도 널리 확산돼 있었다.

◇”조회 수 1억 건 넘어도 잠잠하던 미 주류 매체들 결국…”

루포가 12월10일 처음 터뜨린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에 대한 보도는 소셜미디어 X에서 조회 수가 1억 건을 넘었다. 그러나 그 뒤 10일 동안 미국의 주류 매체는 이를 무시했다.

게이 하버드대 전 총장에게 제기된 논문 표절 의혹의 한 예. 문장 전체를 통째로 베끼지 보다는, 조금씩 변형한 것들도 많이 발견됐다./워싱턴 프리 비콘

루포는 계속 표절 의혹을 터뜨리면서, 주류 좌파 매체 기자들이 ‘하버드대 최악의 학문적 부패’ 스캔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결국 어느 순간 CNN 방송,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BBC 방송들이 번지는 표절 의혹을 보도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고, 이들 매체의 칼럼니스트들도 게이 총장의 사임 가능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이제 게이 총장에게는 반(反)유대주의 대신에, ‘표절 의혹’이란 확고한 꼬리표가 붙었다.

루포는 폴리티코에 “우파에서 시작한 내 입장이 중도 좌파로 넘어가는 순간, 성공은 시간 문제였다. 중도 좌파 인사들은 주류 매체가 보도하면 이 사안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는 합리성과 승낙(permission)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사회의 CRT , DEI, 젠더 이데올로기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전략을 쓴다. 그는 인종ㆍ성 정체성의 다양성과 포용을 강조하는 DEI를, ‘능력 부족’과 같은 말로 몰아붙여 확산시킨다.

◇”정치적 압력ㆍ기부금 유보ㆍ표절 의혹 제기의 잘 조율된 압력 먹혔다”

루포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게이 총장 몰아내기는 “정치적 보수 우파가 좌파가 잡고 있는 미 언론 매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고, 어떻게 압력을 가해야 하는지 성공 전략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루포가 진단한 ‘성공 전략’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 번째는 계속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는 것[표절 의혹 제기]이었고, 두 번째는 재정적 영향력[억만장자들의 하버드대 기부금 유보 압박], 세 번째는 엘리스 스테파닉 하원의원과 공화당이 보여준 정치적 영향력 행사였다. 루포는 “이 세 요소가 합쳐져 강력하게 압박했을 때 오늘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며 “이 세 요소의 플레이어들과 다양한 정도의 협력과 소통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성공 전략’을 숨기지도 않는다. “거짓을 무너뜨리려면 진실이 올바르게 전달돼야 하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것은 권력의 작동 원리를 알고자 하는 이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미국 보수파는 어떻게 해야 보수주의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파, ‘리버럴의 요새’ 엘리트 대학들 체질을 바꾸겠다

미국 대학들을 리버럴이 장악했다는 것은 미국 보수주의자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작년 10월 초 AP 통신의 여론조사에서 대학에서 진보적 견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답한 미국인 성인의 비율은 47%였지만, ‘보수적 견해’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20%에 그쳤다.

미국 공화당은 공립 대학의 경우엔 세금 지원을 축소해서라도, 학문적 성취도보다 유색 인종ㆍ장애 학생ㆍ성 소수자들을 더 환영하는 정책을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루포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지난 수십 년 간 좌파는 미국 학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고등교육기관 교수 직에서 보수파를 밀어내고 아성을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클로딘 게이 총장은 이런 과정의 정점(頂點)에 있었다. 좌파든 우파든, 아무도 게이를 건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도자와 관련해서 인종과 성(性)과 같은 불변의 속성을 그의 학문적 성취나 능력, 인성보다 중요시하는 현대 진보 정치의 신조는 하버드조차도 침범할 수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루포의 주장엔, CNN에서 시사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기고하는 유명 저술가 파리드 자카리아도 동의한다.

그는 자신의 CNN 쇼에서 “유대인 학살을 요구하는 것이 대학 행동 강령에 맞느냐는 질문에도 애매한 답변을 하는 총장들을 보면서, 미국 대중이 이들 엘리트 교육기관에 대한 신뢰를 잃을 만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총장들의 답변은 미국의 엘리트 대학들이 탁월한 학문적 중심이라는 위치에서, 다양성과 관용 같은 정치적 의제를 내세우는 기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라며 “이런 정책은 처음엔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겠지만 이념적 도그마에 빠졌고, 그 결과는 정치ㆍ사회적 공학이지 학문적 능력이 아니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 예로, “미국 대학 인문학과의 교수 직은 지원자의 인종과 성에 달렸다”며, “대통령학을 공부하는 백인 남성은 역사학과에서 종신 직을 받고 싶다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카리아는 그러나 이 DEI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달콤한’ 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반영되는지 일반인들이 알게 되고, 테러집단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1400명 살해와 집단 강간이 미국 대학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마스의 ‘탈(脫)식민지’ 선언으로 이해되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자, 중도 좌파를 포함한 많은 미국인은 미국의 엘리트 교육기관들 안에 이념적 부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4일 칼럼에서 “엘리트 대학들은 게이 총장 사퇴를 주도한 루포가 주창하는 ‘능력(merit)’을 따를 것인지, 사회 변화를 따라서 새롭게 변화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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