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21. 동해안 해방(海防)의 강화
외침이 있으면 이를 막기 위한 방비도 강화되는 것이 상식이다. 고려말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방(海防) 조직, 즉 동해안 수군(水軍)의 군사력도 확충된다. 조선시대 강원·경북 동해안 수군 조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척포진(三陟浦鎭)의 설립과 발전 과정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삼척포진이 조선시대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동해안 해방(海防)의 중심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삼척포진의 진영은 현재의 삼척시 정라항 입구, 육향산 부근에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 과거 삼척군이 발간한 ‘삼척군지’는 ‘고려 우왕 10년(1384년)에 삼척포진을 설치했는데, 현재 오십천 하구, 오분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오화리산성(吳火里山城)이 삼척포진성(城)으로 추정된다’며 ‘원래는 오화리산성에 있던 삼척포진을 조선 중종 15년(1520년)에 육향산 부근에 석성을 쌓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강원대 삼척캠퍼스 배재홍 교수는 지난 2002년에 발표한 논문 ‘삼척 오화리산성(吳火里山城)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세종 14년(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삼척의 성곽으로 읍토성, 두타산 석성, 옥원역토성 등은 기재하고 있으나 오화리산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새로 내용을 첨가해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오화리 산성을 성곽조(城郭條)가 아닌 고적조(古跡條)에서 소개하고 있다”며 “따라서 이미 조선 초기부터 폐기되어 잔형만이 남아 있었을 오화리산성에 삼척포진을 두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배 교수는 “조선은 태조 때 수군을 창설하면서부터 수군은 선상(船上), 즉 배 위를 성보(城堡·성곽과 보루)로 삼아 왜구를 경계하도록 한 이후 성종 15년(1484년) 이전에는 각 포진의 성보 설치가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며 “삼척포만이 법에 금지된 성보를 오화리 산성에 설치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따라서 삼척포진은 지역 내에 전해지는 것 처럼 오화리산성에 있다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육향산 북쪽 지점에 있었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고려 우왕 때 왜적의 침입을 막는 수군 만호영(萬戶營)으로 출발한 삼척포진은 조선 초기에 수군첨절제사가 주둔하는 단독 진영(鎭營)으로 확대 개편된다. 단독 진영을 두었다는 것은 삼척부사가 그 수장을 겸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은 삼척포진을 단독 진영으로 편성, 현재의 기지사령부에 해당하는 부대를 운용하면서 월송포와 울진포, 안인포, 고성포 등 동해안 4곳에 수군 만호(萬戶)를 뒀다. 첨절제사와 만호라는 수군 벼슬은 이순신 장군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첨사, 만호 등의 수군 장수들이 등장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1975년에 발행된 강원총람에 따르면 이들 첨사와 만호들을 총지휘하는 수군절도사는 강원도 관찰사가 겸임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큰 전란을 겪은 뒤에는 군사 체제에 또 변혁이 생겨 인조 5년(1627년)에는 ‘영장(營將)’이라는 직을 만들어 전문적인 무장(武將)이 삼척포진을 책임지도록 했다.
지금 삼척시내 정라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육향산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많은 비석들이 서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들 수군 장수인 영장들의 비석이 특히 많다. 삼척포진의 영장들은 동해안 각지의 만호들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도서 지역을 순찰하고 살피는 수토사(搜討使) 역할도 맡았으니 이들 영장들이 동해 역사에 남긴 족적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김태수 전 삼척시립박물관장은 지난 2001년 삼척시립박물관이 발간한 ‘삼척의 역사·문화 이야기’에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들 영장들의 권한이 막강해 진다고 분석했다. 즉, 영장들은 군사훈련이나 군무와 관련해 지방 수령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강원감사나 병사에게 보고하고, 경고문을 내는 등의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고, 후기로 갈수록 그 권한은 더욱 강해져 지방 수령들과 갈등을 빚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조선 성종 때에는 수군의 포진(浦鎭)에도 병사의 주둔과 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하면서 삼척포진에도 성을 쌓는 축성 작업이 시작됐으나 성이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중종 때(1520년경)로 전해진다. 김태수 전 관장은 “1898년까지만 해도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밑에는 돌로 쌓은 삼척포진의 석성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삼척항을 축조하면서 삼척포진성을 허물어 버렸다”고 말했다.
이 삼척포진성에는 진동루(鎭東樓)라고 하는 유명한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삼척포진성과 함께 형체도 찾기 어렵다. 삼척포진영의 동쪽 문루 역할을 하던 진동루는 동해안 방어의 상징적 존재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지금이라도 복원 작업을 서둘러 삼척항 일대의 역사문화 관광 명소로 가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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