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삼춘’이 삶은 제주 멸고국수…“소문나면 안될건디”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동료들 육지서 왐신디 먹을디 좋은 디 이시민 고리차줍서.”(동료들 육지서오는데 식사할 데 좋은 곳이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어떤디 가젠 햄수과?”(어떤 곳에 가시려고요)
기자의 말에 공무원 생활 20년차인 제주도청 공무원 ㄱ씨가 되물었다. 공대를 나온 그의 취미는 영문법책 모으기. 토익점수가 최상위지만, 지금도 만점에 도전하고 있다. 걷기로 각종 성인병을 치유한 걷기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아맹해도 제주도 음식이 좋지 안허카마씸?”(아무래도 제주도 음식지 낫지 않을까)
“게민 거기갑서게. 오늘 금요일이난 호꼼 빨리 가살거우다.”(그럼 거기 가세요. 오늘 금요일이니 조금 일찍 가얄겁니다)
기자가 “아, 그디 생각못했져”(거기 생각못했구나)라고 맞장구 치며 길을 나서자, 그가 등 뒤에서 작은 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디 소문나민 안될건디.”(거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기자가 동료들과 함께 향한 곳은 제주도청 주변 고기국수 전문점 ‘진진’. 세밑 몰아친 한파가 몸을 웅크리게 했지만, 가게 안은 손님들의 체온과 주방에서 흘러나온 면 삶은 열기로 훈훈했다.
진진은 관광객보다는 제주도민들이 찾는 국수맛집이다. 매주 금요일 점심때면 넉넉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 하얀 머리의 ‘삼춘’(제주에서는 나이 많은 이웃을 친근하게 이렇게 부른다) 박영훈(71)씨가 웃으며 반갑게 맞는다.
“기다립써. 쫌 이시민 자리 나옵니다.”(기다리세요. 조금 있으면 좌석이 나옵니다)
5분 남짓 기다리자 4명이 앉을 테이블이 나왔다. “난 고기!”하자 동료 둘이 손을 들었고, 한 명은 ‘멸고’를 선택했다. ‘고기’는 고기국수를, ‘멸고’는 멸치국수와 고기국수를 합친 국수를 말한다. 가게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남자 삼춘’이 전부다. 최근에는 아들도 나와 부모 일을 돕고 있다. 주방은 ‘여자 삼춘’ 담당이다. 여자 삼춘이 육수를 끓이고, 국수를 만들어내놓으면 남자 삼춘과 아들이 내간다.
우리나라에 국수가 들어온 것은 1천년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1653년 하멜 일행이 탄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베르호가 제주에 표착했을 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마을주민이 ‘먹다 남은 국수 그릇’을 갖고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서도 국수의 기원은 최소 370년은 넘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남유잡기’(南游雜記)라는 글에서 “막걸리와 밀국수는 삼국(시대)적부터 있는 순수한 조선 음식이오, 소주와 모밀국수는 비교적 근대에 들어온 지나식(중국식) 음식인 듯하다. 길을 가다가 주막에 들어 앉아서 냉수에 재워놓은 막걸리와 칼로 썰은 밀국수를 먹을 때에는 1천년 (전)에 돌아간 듯하더라”(<삼천리>, 1938. 8)며 막걸리와 국수의 조합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고기국수는 제주도의 향토음식 가운데 역사가 가장 짧은 음식 가운데 하나다. 꿩국수, 모멀(메밀)국수에 대한 속담과 문헌에 더해, 1970년 2월 보목리잠수회(서귀포시 보목동 해녀회)가 회의를 끝내고 ‘가락국수에 호박나물을 얹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고기국수’에 대한 것은 없다. 1970년대부터 2000년 초까지 발간된 제주도 향토음식 소개 책자에서도 고기국수를 찾아볼 수 없다. 기자가 제주도에서 취재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 초에도 고기국수를 먹으러 간 기억이 없다.
고기국수가 처음 ‘제주도 음식’으로 소개된 것은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이 2008년에 펴낸 <한국의 전통향토음식10, 제주도> 편이다. 이어 2014년 제주대가 펴낸 <맛과 건강을 창조하는 제주 7대 대표 향토음식-스토리와 표준레시피>에 ‘잔치집 돗궤기(돼지고기)국수-고기국수’가 등장한다. 10여년 전에야 비로소 제주도의 대표 향토음식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제주시 삼성혈 주변에 ‘국수거리’가 생길 정도로 고기국수는 제주도의 최고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2, 3차를 끝낸 뒤 동료들과 늦은 밤 국수가게를 찾아 고기국수나 멸치국수에 물만두를 주문하고, 다시 소주 한잔을 마셔 속을 달랜 뒤 자리를 파하는 주당들도 있다.
고기국수가 빠르게 제주도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제주도가 돼지고기로 유명하기 때문일 듯 하다. 진진의 남자 삼춘은 “과거에도 고기국수가 있었겠지만, 그때는 멸치국수에 고기를 몇점 올려놓아서 고기국수라고 했던 것 같다. 고기국수가 본격적으로 알려진건 1990년대 초중반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주에서는 큰 일(경조사) 때 돼지고기를 삶아낸 국물이 많이 쓰인다. 국물에 몸(모자반)을 넣고 끓이면 ‘몸국’이 되고 국수를 넣으면 고기국수가 된다. 여자 삼춘은 “예전에 촌에서는 3∼4일 잔치하는 집들도 있었다. 그때 돼지를 적게는 3∼4마리, 많게는 10여마리를 잡았다”며 “돼지뼈와 고기로 푹 고아낸 육수를 사용해 몸국이나 국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제주에선 큰 일을 치를 때 마을사람들이 모여 돼지 등을 잡아 나누는 것을 ‘추렴’이라고 한다. 기자도 1980년대 초 고교시절 과수원에서 돼지추렴을 거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기준으로야 동물학대라고 비난받겠지만, 그때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진진이 지금의 제주도청 주변에 자리를 튼 것은 2008년이다. 1984년부터 학교 구내식당에서 잔치국수를 말았던 삼촌 부부가 개업하기로 마음먹고 제주시내 곳곳을 다니며 국수를 맛보고 연구한 뒤 4인용 식탁 7개를 놓고 시작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주변 직장인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알음알음 찾아왔다. 2020년 2월에 30여m 떨어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식탁이 9개로 늘었고, 가게 안은 훨씬 밝고 넓어졌다.
부부는 “멸고는 우리가 제주시내에서는 가장 먼저 내놓은 가게 가운데 한 곳이다. 배드민턴을 같이 하는 동호회 지인이 와서 멸치국수를 주문했는데 국수를 먹다가 ‘멸치국수에 (돼지)고기를 얹으면 멸치고기국수잖아’하는 말에 멸고국수를 만들게 됐다”며 “멸고가 더 깔끔하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웃었다.
진진의 고기국수는 돼지뼈(사골)를 우려낸 육수를, 멸고는 멸치를 사용한 육수를 사용한다. 둘 다 먹음직한 크기로 편육처럼 썬 돼지고기를 몇점씩 올려놓는다. 남자 삼춘은 “돼지뼈로만 우려야 육수다운 육수가 나온다. 손님들에게 내어놓으려면 5시간 넘게 우려내야 한다”고 했다.
두툼한 면발을 젓가락에 말고 국수에 얹힌 돼지고기를 올려 후루룩 먹었다. 신중을 기하며 주문했던 동료들이 “역시 제주도 고기국수네!”라는 경탄과 함께 그릇째 들고 육수를 들이켰다. 진진의 고기국수는 ‘베지근하다’는 제주말이 들어맞는다. 둥갈둥갈하게 기름진 육수가 ‘진하고 담백한 맛’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베지근함으로 속을 든든하게 한다. 가끔 일손이 달릴 땐 막걸리를 내놓는 것도, 김치를 추가로 주문하는 것도 손님 몫이다.
진진의 강점은 국수에 앞서 돔배(도마)에 돼지고기 3∼4점이 나오는 것. 따뜻한 돼지고기는 막걸리를 부른다. 일반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내놓는 여느 식당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육수 냉장고에 재워뒀다가 내놓는다. 차가운 막걸리 한 모금이 목줄기를 넘어가자 온 몸에 전율이 인다. 말이 필요 없다. 이광수가 언급한 막걸리와 국수의 조합은 ‘진진’에서 극대화한다.
겨울철, 모락모락 김이 어리는 창가에 앉아 고기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잔. 매주 금요일, 고기국수를 먹지 않으면 일주일이 가지 않은 것 같다던 퇴직한 선배가 떠오른다. “역시 금요일엔 고기국수지.”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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