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 떨어진 지상파 연말 시상식, 해법은 없나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4년 새해가 밝았다. 2023년을 마무리한 지상파 3사의 연예대상과 연기대상도 모두 끝났다. 그런데 이번 연말 시상식을 보니 확실히 달라진 지상파의 현재가 보인다. 현재 지상파들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고,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떤 과제를 안고 있을까.
KBS가 선택한 《고려거란전쟁》의 최수종
2023년 지상파 3사의 연기대상이 각각 꼽은 대상은 KBS 《고려거란전쟁》의 최수종, MBC 《연인》의 남궁민, SBS 《모범택시2》의 이제훈과 《악귀》의 김태리였다. 이 중 최수종과 남궁민은 이미 모두가 예견했던 결과였고, 이제훈과 김태리도 공동 수상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 범위 안에 있던 선택지들이었다. 이처럼 대상 수상자들이 어느 정도 예측되고 실제로 그들이 대상을 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2023년 지상파 3사의 드라마 중에서 경합을 벌일 만큼 다양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만큼 각 방송사에서 한두 작품이 독보적인 성과를 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KBS의 경우 《오아시스》와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상반기에, 《혼례대첩》과 《고려거란전쟁》이 하반기에 그나마 주목받은 작품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대하사극인 《고려거란전쟁》을 빼놓고는 두드러진 성과를 낸 작품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미니시리즈의 이런 성적은 2023년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2022년에도 KBS의 미니시리즈들은 성과를 낸 작품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법대로 사랑하라》 《진검승부》 《붉은 단심》 정도랄까. 이처럼 KBS 미니시리즈가 계속 저조한 성적을 낸 건, 제작비 투자가 타 방송사들과 비교해 너무나 일천했기 때문이다. 대본이 나오면 tvN, JTBC, SBS를 거친 후 맨 마지막에 KBS로 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제작비가 적어 좋은 대본이 오기 어려워졌고 당연히 참신하고 완성도 높은 미니시리즈가 나오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KBS가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던 건 주말드라마와 대하사극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KBS 연기대상의 대상 역시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의 주상욱이 《법대로 사랑하라》의 이승기와 함께 공동 수상했다. 《태종 이방원》의 경우는 동물 학대 논란까지 있어 대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어딘가 찜찜한 면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흐름 그대로 올해는 《고려거란전쟁》의 최수종이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 대상 역시 작품이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여전히 찜찜함은 남았지만 그래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작품인지라 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주말드라마다. 이미 작년부터 휘청이던 KBS 주말드라마는 올 들어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때 50%까지 육박했던 시청률은 옛날 이야기가 됐다. 《진짜가 나타났다》는 최고시청률이 고작 23.9%(닐슨코리아)에 머물렀고, 《효심이네 각자도생》 역시 20%대 시청률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 KBS 연기대상에서 《효심이네 각자도생》의 유이와 《진짜가 나타났다》의 백진희가 각각 최우수상, 우수상을 받긴 했지만 일종의 배려와 응원 차원에 가깝다.
연말 즈음에 《고려거란전쟁》과 《혼례대첩》이 괜찮은 반응을 얻었기에 망정이지, 두 작품마저 없었다면 초라한 시상식이 될 뻔했다. 이제 KBS 드라마는 대하사극이나 퓨전사극처럼 좀 더 강점을 갖고 있는 작품들에 힘을 쏟는 게 훨씬 효과적인 선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니시리즈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점점 줄고 있는 편성에서 알 수 있듯이 OTT 시대에 경쟁하긴 어려워졌다. 다만 제작비를 좀 더 적게 투입하고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성비 있는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들이 KBS라는 플랫폼에 더 적합한 드라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인》으로 반전한 MBC, 장르물의 덫에 갇힌 SBS
MBC 역시 하반기 들어 《연인》이 방영되기 전까지 2023년 드라마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상반기에 방영된 《꼭두의 계절》 《조선변호사》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과 하반기의 《오늘도 사랑스럽개》가 모두 성과를 내지 못했다. 《꼭두의 계절》은 판타지 드라마였지만 갈수록 화제성이 떨어져 1%대로 종영했고, 《넘버스》는 회계사라는 색다른 직업의 세계를 가져온 복수극이었지만 역시 2%대로 종영했다. 《조선변호사》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우도환의 호연에도 2%대 시청률로 마무리됐고, 키스하면 개로 변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였던 《오늘도 사랑스럽개》 역시 1%대 시청률로 끝을 맺었다.
그나마 반전을 일으킨 건 《연인》이었다. 사실 이 작품 역시 대본이 돌 때만 해도 그다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하지는 못했던 드라마다. 하지만 남궁민이 등판하면서 익숙한 멜로 서사의 틀마저 좀 더 깊은 감정적 진폭을 만들어내면서 상승곡선을 그렸다. MBC 연기대상에서 남궁민이 대상을 받고 그 상대 역할이었던 안은진이 최우수상을 받은 건 그래서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역시 다소 어설픈 대본임에도 이세영이라는 배우의 독보적인 팔색조 매력을 앞세워 괜찮은 성적을 냈다. 물론 《연인》은 긴 서사 위에서 괜찮은 완성도를 만들어낸 작품이었지만, 그럼에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데는 배우의 힘이 압도적으로 작용했다. 이런 성과는 공교롭게도 이미 2년 전 《검은태양》의 남궁민과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이세영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재연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결국 MBC의 이런 성과에는 배우들의 지분이 확실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MBC 드라마의 고민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래서 이런 상승세는 지난 몇 년간 아예 드라마를 포기한 듯이 투자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드라마공화국'이라고 불리던 MBC 아니던가. 올해 라인업을 보면 확실히 MBC 드라마의 공격적인 선택들이 기대감을 만든다. 이하늬의 《밤에 피는 꽃》, 김남주의 《원더풀월드》, 이제훈에 의해 부활한 《수사반장 더 비기닝》, 김희선 주연의 《우리집》, 한석규 주연의 《이토록 친밀한 배신》이 그 작품들이다.
SBS는 스튜디오S가 자회사로 분리돼 드라마를 제작하고 수급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 타 지상파들보다 공격적인 투자들이 이뤄졌고 그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도 많았다. 그중 두드러지는 건 장르물이다. 올해 SBS 연기대상이 《모범택시2》의 이제훈과 《악귀》의 김태리 공동 대상 수상을 결정한 건 SBS의 장르물 성과들이 두드러졌다는 증거다. 이 밖에도 《법쩐》 《낭만닥터 김사부3》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와 함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순옥 작가의 야심작 《7인의 탈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2023년 SBS 드라마가 아쉬웠던 건 좀 더 자극적인 장르물이 대부분인 데다 그것도 시즌제로 채워져 새로운 참신한 작품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나마 독보적이었던 건 《악귀》였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대부분 시즌2, 시즌3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장르물과 좀 더 센 자극에 경도되다 보니 전반적으로 피로감이 누적됐고 《7인의 탈출》 같은 내용도 완성도도 없는 막장에 46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어이없는 결과가 등장했다. 결국 《7인의 탈출》이라는 괴물은 장르의 공식을 답습하면서 더 센 자극만을 추구했던 데서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올해도 여전히 SBS 장르물이 대거 포진돼 있는 형국이다. 안보현 주연의 《재벌X형사》, 김동욱 주연의 코믹 수사물 《강력반》과 《열혈사제2》, 지성·전미도의 범죄 스릴러 《커넥션》, 박신혜의 판타지 로맨스 《지옥에서 온 판사》가 그 작품들이다. 장르물과 시즌제의 흐름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 SBS 드라마가 올해는 한계를 넘어 어떤 반응을 얻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지상파의 연기대상이 과거와 달리 치열한 경합이 아닌 거의 예측 가능한 수상을 할 정도로 힘이 빠진 것처럼, 지상파의 연예대상 역시 긴장감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다. 그나마 MBC가 기안84에게 대상을 준 것이 가장 큰 화제가 됐을 뿐, KBS의 《1박2일》 팀이나 SBS의 탁재훈 대상 소식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지상파, 이제 플랫폼의 틀에서 벗어나야
특히 KBS가 《1박2일》 팀에 대상을 주면서 시청자들이 트럭 시위까지 하며 막으려 했던 《홍김동전》의 폐지는 결국 결정됐다. 시청률은 1%대에 머물렀지만 OTT 등에서 큰 화제성을 불러일으켰던 《홍김동전》 폐지와, 화제성이 사라졌지만 고정 시청자들에 의해 일정한 시청률을 내고 있는 《1박2일》 팀에 대상을 준 결정은 KBS 예능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트렌디한 새로운 시도를 응원하기보다는 보수적인 장수 프로그램의 손을 들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KBS의 향후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래서 보수적인 선택들로 시청률을 가져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전면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OTT 쪽으로 예능 트렌드가 옮겨가고 있는 추세에 더더욱 멀어지는 방향성이 아닐 수 없다.
《신발 벗고 돌싱포맨》과 《미운우리새끼》의 탁재훈에게 데뷔 30년 만에 대상을 준 SBS 예능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관찰카메라 방식의 리얼리티쇼에 특화된 SBS 예능 프로그램들은, 2023년 새로운 예능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잇겠다는 야심으로 시작한 《손대면 핫플-동네 멋집》은 별 관심을 얻지 못한 채 폐지가 결정됐고, 《녹새아버지회》 같은 프로그램도 좋은 취지와 달리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진 못했다. 그보다는 장수 프로그램에 가까운 《미운우리새끼》 《런닝맨》 《동상이몽2》와 그나마 최근에 시작됐던 《골때리는 그녀들》이 SBS 예능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올해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먹찌빠》 같은 프로그램이 그나마 주목받고 있지만 새로움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나마 MBC의 대상 수상자 기안84가 화제가 된 건 변화하고 있는 트렌드를 가장 잘 반영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기안84가 출연했던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유튜브와 지상파의 절묘한 결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날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현지인들과 좀 더 가까이 밀착 소통하는 기안84는 여기에 딱 어울리는 아이콘이 됐던 것. 하지만 MBC 역시 《놀면 뭐하니?》 같은 프로그램이 이렇다 할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채 트렌드에서 밀려나고 있어 전반적인 지상파 예능의 퇴보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넷플릭스가 거대 자본으로 블록버스터 예능을 선도하고 있고, 유튜브가 정반대로 적은 투자로 효과를 내는 가성비 예능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어 갈수록 지상파 예능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연말 시상식이 보여주는 지상파의 위상은 그 하락세가 역력하다. 그렇게 된 건 OTT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시청자들의 이탈이 본격화하고 있어서다. 이미 예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지만, 지상파는 이제 과거 같은 플랫폼의 지위를 통해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KBS 같은 공영방송은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차별점으로 세우는 전략이 필요하고, MBC나 SBS의 경우는 플랫폼이 아닌 콘텐츠 회사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런 변화가 있어야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모쪼록 올해는 지상파가 차별성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여 시청자들의 시선을 다시 끌 수 있기를 바란다. 올 연말 시상식에는 다른 풍경들이 그려지기를.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길 가던 여고생 노린 악랄한 성범죄자의 치밀한 계획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 시사저널
- 웃으며 개조한 칼로 기습 공격…이재명 ‘무방비 상태’ 노렸다 - 시사저널
- 8세 친딸에 성범죄 저지른 40대, 출소 후 재범했다 - 시사저널
- 美, 질소가스로 첫 사형 집행한다…“고통스럽고 굴욕” 반발 - 시사저널
- ‘박근혜 최측근’ 유영하 “탄핵, 곧 역사적으로 재평가 될 것” - 시사저널
- 재난 중에도 야욕 드러낸 日…쓰나미 경보에 ‘독도 일본땅’ - 시사저널
- “제2의 태영건설 나올 수도”…건설업계 휩쓰는 ‘줄도산’ 공포 - 시사저널
- 초1 여동생 성폭행해 유산시킨 친오빠…‘징역 12년 무겁다’ 항소 - 시사저널
- 왜 억만장자들은 지하벙커를 만드는 걸까 - 시사저널
- 기대수명 82년의 한국인, 17년은 골골거린다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