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떨림'과 '열림'을 기원하며…故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에 부쳐

김종구 (언론인) 2024. 1. 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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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고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행동하는 양심" "기적은 기적적으로 오지 않는다" "자유는 지키는 자만의 재산이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들이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역시 고인의 명언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말의 질감과 무늬는 앞에 열거한 어록과는 사뭇 다르다. 앞의 말들이 굳건한 의지, 흔들리지 않는 결연한 각오를 담고 있다면, '서생-상인' 발언에서는 왠지 모를 번민과 고뇌가 묻어나온다.

'서생-상인' 발언은 막스 베버가 말한 '신념 윤리' '책임 윤리'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의 평화로운 조화를 말한 게 아니다.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이 정치의 운명임을 강조한 것이다. 책임 윤리란 신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예상하고 그 결과까지 감당하는 태도다.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이라는 정치의 운명을 기꺼이 껴안고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정치의 소명이라고 베버는 보았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란 말도 비슷하다.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이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한다는 식의 해석은 너무 헐겁다. 상인의 현실감각은 필연적으로 이해타산, 거래, 협상, 흥정 등의 단어를 수반한다. '서생-상인'의 말에는 양자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한 고인의 고민이 배어 있다. 기나긴 정치 역정 내내 목적과 수단, 목표와 방책,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하고 고뇌한 스스로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만 같다. 나는 이것을 '떨림'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그리고 이 떨림이야말로 정치 거인 디제이(고 김대중 대통령의 애칭)를 더 잘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숱한 투옥과 망명, 연금,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 양김 단일화 실패, 잇따른 대선 도전 실패, 정계 은퇴와 복귀, 분당과 통합, 네 번째 대선 도전의 승리, 재임 시절의 찬란한 업적, 그리고 그림자, 찬란한 낙조…. 디제이의 오랜 정치 역정에는 강철같은 신념 못지않게 고비고비 떨림이 있었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서생적 고민은 진화하는 떨림의 연속이었다. 목표를 실천하는 방도를 찾아가는 상인의 현실감각에서도 늘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이 그의 정치를 단단하게 이끌었다.

Ⅱ. 떨림이 사라진 한국 정치

떨림은 '울림'(공명)의 전제조건이다. 떨림과 떨림이 만나 공명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떨림이 없으면 울림도 없고 열림도 없다. 떨림이 없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명체가 굳어졌음을 뜻한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이자 시인인 민영규 교수가 쓴 뒤 훗날 신영복 선생이 <담론>과 서화집을 통해 '떨리는 지남철'로 소개하면서 유명해진 글이다.

지금 가는 방향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 지남철(나침반)의 역할이다. 바늘이 떨림을 멈추고 한쪽에 고정되는 순간 '죽은 나침반'이 된다. 떨림이 없는 정치는 죽은 정치다. 바늘 끝이 움직이지 않는 나침반을 따르는 정치는 혼돈의 정치다. 떨림이 중단된 상태에서 '공명의 정치'는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의 열림도 없다. 죽은 나침반끼리 부딪치는 파열음만 요란할 뿐이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떨림이 사라진 정치다. 죽은 나침반의 정치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지고지선으로 여기며 그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정치의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적'을 치기 위한 무기다. 폭력적 언어의 백병전 속에서 정치는 시들고 황폐화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테러 사건은 닫힌 정치, 혐오 정치, 죽은 정치의 가장 비극적 표현이다.

나라의 운명을 일차적으로 책임진 대통령, 그리고 여권 지도자들의 나침반은 바늘의 떨림을 멈춘 지 오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을 탐색해야 할 나침반 바늘이 작동을 멈추고 과거만을 가리키고 있다. 죽은 나침반에 기댄 국정 운영은 혼돈의 항해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언어가 떨림과 울림을 잃은 지도 오래다. 지금의 정권을 탄생시킨 키워드 '공정과 상식'이란 말에서 감동과 기대, 희망이 전해져오는가.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상식은 생명을 다한 사어(死語)다. '여의도 사투리'를 욕하면서 '서초동 사투리'가 대신 표준어가 된 한국 정치의 현실은 또 어떤가.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내적으로는 어둠에 가득 차 있고 외적으로는 잔혹함과 고통, 불의로 세상을 어둡게 한다."(사울 알란스키).

Ⅲ. 민주당 분열 사태와 '디제이 정신'

'디제이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현 여권을 향해 쓴소리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어차피 디제이 정신과 무관한 사람들이다. 아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쓴소리의 화살은 오히려 야권 지도자들에게 향해야 마땅하다.

민주당은 지금 분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재명 대표와 이낙연 전 총리의 만남은 무위로 끝났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는 어떠한 떨림도 울림도 없었다. 이미 그들의 나침반이 확고한 방향을 정하고 흔들림을 멈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 역정에서 몇 차례의 분당과 통합의 과정을 겪었다. 양김 단일화 무산 이후 평화민주당 창당, '3당 야합'에 참여하지 않은 '꼬마 민주당'과의 통합. 정계 복귀 뒤 민주당에서 벗어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야권 분열에 대한 디제이 책임론은 그에게 큰 짐이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민주당을 복원하려 애썼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내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의원들을 영입했을 때 그는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새천년민주당 창당으로 민주당 명칭을 되찾았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은 전통 민주 세력의 뿌리였기에 나는 그 이름을 다시 찾고 싶었다. 비록 불가피하게 과거 민주당을 떠나 '국민회의'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대선 승리에 이르게 되었지만 나의 정치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민주당이었다. 그런 의견을 실무진에게 전달했다. 내 뜻을 헤아려 주었는지 당명이 '새천년민주당'으로 결정되었다. 그런 사실을 보고받고 기뻤다."

그러나 민주당은 디제이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인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다시 분열했다. 이낙연,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잔류파는 소수였고 대다수는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다. 디제이는 민주당 분당 사태에 우려를 표명하고 분당을 막으려 설득과 만류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민주당이 쪼개지는 모습을 속수무책 지켜보아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이듬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강행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역풍이 불면서 민주당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김대중이 나서 줄 것을 간절하게 바랐다. 김대중의 정치 철학과 정책을 계승한 적자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김대중은 나서지 않았다. (…) 정 많은 노인네가 측근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DJ는 꽃 지는 봄밤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김택근 <새벽 : 김대중 평전> 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이라는 명칭을 되찾은 더불어민주당이 다시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3년에는 이낙연 전 총리가 '분당의 객체'였다면 이번에는 '분당의 주체'가 되려 한다.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야당 지도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신당 창당을 추진 중인 이낙연 전 총리가 갖고 있는 '서생적 문제의식'(비전과 철학)은 무엇인가. 그가 말해온 '김대중의 정치 철학과 정책 계승'은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 당을 수호해야 할 이재명 대표는 분당을 막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이 대표는 디제이가 강조한 '상인의 현실감각'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정당의 분열 사태 앞에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을 것인가. 민주당의 수많은 원로들은 당의 쇄신과 단합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궁극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이 사태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 '디제이 키드'를 자처하는 야당 지도자들은 자문자답해보기 바란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있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걸린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현수막. ⓒ연합뉴스

6일 오후 경기 일산시 고양구 킨텍스에서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여야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들은 앞다투어 고인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높이 기릴 것이다. 민주, 평화, 관용, 통합, 화해 등 김대중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다짐도 할 것이다. 그러나 떨림을 멈춘 나침반에 이런 정신이 스며들 공간은 없다.

한국 정치는 이제 죽은 나침반을 버려야 한다. 바늘 끝이 다시 움직여야 한다. 떨림이 다시 시작돼야 한다. 김대중 정신을 입이 아니라 진정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멈춰 섰던 바늘 끝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나침반의 떨림과 떨림이 만나고, 울림과 울림이 이어질 때, 새로운 정치도, 새로운 대한민국도 열린다. 이번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한국 정치의 새로운 떨림, 울림, 열림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김종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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