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규제에 “韓AI 다 죽는다" 한숨 나오는 이유[기자수첩]
[서울=뉴시스]최은수 기자 = 여일이불약제일해(與一利不若除一害), 생일사불약멸일사(生一事不若滅一事).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해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칭기즈칸의 책사 야율초재의 말이다.
정부가 플랫폼공정경쟁촉진법(플랫폼범) 입법을 강행하려는 모습을 보면 야율초재의 이 말이 떠오른다. 전세계가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에 뛰어든 가운데, 우리나라 AI 산업은 정부 규제로 싹이 트기도 전에 좌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서다.
플랫폼법은 정부가 소수의 플랫폼 사업자가 시장을 독식하면서 발생하는 독과점 폐해로부터 소상공인·스타트업·소비자 등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로 추진되고 있는 새로운 법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관계 부처 및 국회와 긴밀히 협의해 제정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플랫폼 시장에서 지배적 사업자를 지정한 뒤, 자사 우대·끼워 팔기·멀티호밍 제한·최혜 대우 요구 등 네 가지 반칙 행위를 금지하는 사전 규제가 이 법안의 골자다.
유럽연합(EU)의 디지털시장법(DMA)처럼 매출·이용자 수 등을 이용해 규제 대상 사업자를 사전 지정한다. 포털과 메신저에서 네이버와 카카오(계열사 포함), e커머스는 쿠팡, 동영상은 구글(유튜브) 등이 지정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과징금 등 제재 수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매출액의 6∼10% 범위 안에서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플랫폼 독과점에 따른 폐해가 전통 오프라인 산업의 독과점 폐해보다 파급력이 크다는 점에서 이를 막기 위한 규제는 불가피하다는 측면은 이해되지만, 정부의 새로운 입법 추진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가령, 법률은 사각지대가 없는데 조사 착수에서 제재안 의결까지 걸리는 시일이 문제라면 절차를 개선하면 되지, 굳이 사전 규제까지 도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다.
가령, 사전규제 대상이 되면 더 이상의 서비스 혁신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정상적인 기업 경영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걱정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등 해외 플랫폼이 수혜를 입고, 토종 플랫폼은 경쟁에서 밀리는 역차별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전세계 초거대 AI 경쟁에 발 맞춰 플랫폼들이 적극 추진하고 있는 신사업 분야인 AI 행보에도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통상 플랫폼 산업은 네트워크 효과(특정 서비스 가치가 사용자 수에 비례해 증가하는 현상)에 기반해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며 플랫폼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플랫폼법이 시행될 경우 사전규제 대상 사업자들은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거나 기존 정책을 바꿀 때마다 향후 법적 시비가 발생할 여지가 있을 지 반드시 사전 점검해야 한다. 자칫 천문학적 과징금 제재를 피하려면 어쩔 수 없다. 서비스를 새로 적용하거나 괜찮은 스타트업을 인수할 때 경쟁사 혹은 규제당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물론 자가 검열까지 불가피하다. 서비스 혁신 시도가 위축될 게 뻔하다.
우리나라는 구글, 오픈AI 등 해외 빅테크에 대항해 자체 개발한 자체 AI 플랫폼을 갖춘 소수 국가 중 하나다. 그 중 LLM(대규모언어모델)을 보유한 기업에 네이버, 카카오 등 플랫폼이 속한다.
스타트업들 역시 플랫폼법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플랫폼 산업이 위축되면 스타트업이 성장해서 상장하기 힘들어지고, 미국 실리콘밸리식 기업 혁신과 엑시트(exit) 문화가 실종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네이버나 카카오 등 주요 플랫폼 기업들의 스타트업 투자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작년 미국에선 하원 및 상원의 빅테크 반독점 관련 주요 법안(플랫폼 독점 종식 법률·Ending Platform Monopolies Act 등)이 모두 폐기됐다. 틱톡·핀둬둬 등 중국 플랫폼의 선전으로 인해 AI 기술 패권에 대한 위기감이 커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오픈AI 등 글로벌 빅테크에 대항해 자본, 전문인력·이용자 기반이 모두 열세인 우리나라 기업들이 AI 데이터 주권을 가지려면 정부의 진흥책이 절실한데 각 정부부처들은 플랫폼 규제안 만들기에 바쁘다. 플랫폼법도 명목상 독과점 남용을 막겠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AI 산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디지털시장법(DMA)은 구글, 아마존, 메타, 틱톡 등 미국·중국 등지의 거대 해외 플랫폼 독과점 횡포에 맞서 자국 산업과 이용자들을 보호하겠다는 취지가 강한데, 정작 이를 벤치마킹한 플랫폼법은 오히려 자국 플랫폼의 성장기회만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공정위가 구글 등 해외 기업도 사전 지정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서버 소재지와 매출 회계 적용지가 해외에 있어 법 집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우리는 이미 '타다금지법'으로 과도한 사전규제가 어떻게 서비스 혁신의 '싹'을 잘라내는지, 그리고 그 여파로 특정 서비스의 독점화에 어떻게 도움을 줬는지 경험했다. AI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골든타임’을 '옥상옥 규제'로 인해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공감언론 뉴시스 eschoi@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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