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보단 인맥쌓기 열중” … 영국 정치 산실 ‘옥스퍼드의 민낯’ [북리뷰]
사이먼 쿠퍼 지음│김양욱·최형우 옮김│글항아리
80년간 13명의 총리 배출 대학
얕은 지식·순발력 발휘가 미덕
공부하는 학생 오히려 조롱받아
핵심 토론클럽 회장 출신인 존슨
유창한 언변으로 이미 유명인사
독재·기근 겪어보지 않은 세대
영국 망친 ‘브렉시트’ 주도하기도
데이비드 캐머런과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와 리시 수낵까지. 2010년부터 지금까지 영국을 통치한 전·현직 영국 총리들은 모두 한 대학을 나왔다. ‘옥스퍼드’. 1940년부터 현재까지 17명의 총리 중 13명이 옥스퍼드 출신이다. 총리뿐 아니라 현 정부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클 고브와 제이컵 리스모그, 제러미 헌트 등이 모두 동문이다. 한 해에 옥스퍼드에 입학하는 신입생 수는 3000명 남짓. 또래 집단의 0.5%도 안 되는 수의 이 ‘초엘리트’들이 영국을 장악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역시 옥스퍼드 출신으로 보리스 존슨, 제이컵 리스모그 등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저자는 1980년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이 초엘리트 그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면밀히 파헤친다. 그리고 이 그룹이 어떻게 현재의 영국 정치를 만들어냈는지를 분석한다.
책은 옥스퍼드의 민낯을 공개하며 시작한다. 1980년대 당시 옥스퍼드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20시간에 불과했다. 학생 대부분의 주된 목표는 인생을 즐기고 평생의 우정을 쌓는 것이었으며 “대학의 전반적인 기풍은 반(反)지성적이고 남성적이며 술에 찌들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오히려 조롱을 받았다. 잘 놀고, 인맥을 쌓고, 얕은 지식으로 순발력을 발휘하는 게 당시 옥스퍼드 학생의 미덕이었다.
‘넓고 얕은 지식’은 옥스퍼드의 특징이었다. 그 시절 옥스퍼드에서 관료 양성을 위한 핵심 전공은 철학·정치·경제(PPE).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 모두 PPE를 공부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철학과 정치, 경제를 공부하는 일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얕은 지식으로도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밥을 벌어 먹고사는 방법을 옥스퍼드에서 너무 잘 배웠다”고, “지식이 없어도 아는 것 이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곳이 바로 옥스퍼드였다”고 말한다.
옥스퍼드의 핵심은 토론 클럽 ‘옥스퍼드 유니언’이다. PPE와 더불어 옥스퍼드가 그렇게 많은 총리를 배출해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모임인 이곳은 일종의 작은 의회였다. 정장을 갖춰 입고 타이를 매고 서로를 ‘존경하는 의원님’이라 부르며 토론을 했다. 하지만 실제 의회와 큰 차이가 있다면,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는 것. 이에 유니언은 자연스레 정책보다는 수사(rhetoric)에 집중했다. 미래의 정치인, 변호사, 언론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실을 믿든 말든 상관없이 어떤 경우라도 반박할 수 있는 논리정연함을 갖추기에 완벽한 곳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이는 보리스 존슨이다. 배신과 협잡이 난무한 선거운동 과정을 거쳐 유니언의 회장까지 맡았던 그는 이미 그때 유명인사였다. 금발의 백인 청년, 고전을 활용한 수사와 센스 있는 농담은 그의 주무기였다. 정신없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은 ‘나는 확고한 특권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규범은 마음대로 어겨도 된다’는 이미지를 품고 있다.
책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야기로 나아간다. 사실 브렉시트는 저자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만약 보리스 존슨, 마이클 고브, 대니얼 해넌, 도미닉 커밍스, 제이컵 리스모그가 옥스퍼드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했다면 브렉시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독재, 기근, 내전, 침략, 경제 붕괴를 겪지 않은 가장 운 좋은 세대이자 그중에서도 큰 특권을 가진 계급의 구성원들이라는 점. 이들의 유일하게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과거 영국의 위대함에 대한 막연한 동경뿐이었고 EU로 인한 영국의 주권 문제는 이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브렉시트는 다시 영국의 영광스러운 시대에 살 기회를 제공해줄 명분이었다.
결국 2016년 국민투표 결과 브렉시트는 성사됐고 존슨은 유니언 회장 자리를 꿰찼던 것처럼 총리 자리를 쟁취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브렉시트를 일종의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 선거운동쯤으로 취급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288쪽, 1만80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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