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식 말하기, 원조는 <공공의 적> 강철중?
정치인의 화법은 그의 정체성과 정치적 방향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존 F. 케네디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정치인입니다. 달 착륙 연설이 대표적인데요, 그는 여기서 프론티어로서의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이번 10년 안에 달에 가서 다른 일들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을 이끌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는 말로 리더로서의 자신감과 낙관주의를 표상했습니다. 노변담화(fireside chats)라고 불린 라디오 방송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데요, 불안한 경제와 안보 상황에서 시민들을 다독이는 따뜻한 정치 스타일 그 자체였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정치인입니다. 2015년 6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한 흑인교회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추모 연설 도중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흑인들의 영가이자 찬송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였습니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를 보여준 장면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어떤 말로 자신의 정치 스타일과 철학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중대범죄가 법에 따라 처벌받는 걸 막는 게 지상 목표인 다수당이 더욱 폭주하면서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 당을 숙주 삼아 수십 년간 386이 486, 586, 686 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중략)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은, (중략) 바로 우리가 그 운동권 특권정치를 대체할 실력과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6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한동훈 위원장이 한 말입니다.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부터 특유의 직설 또는 독설 화법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한 위원장은 장관직을 물러날 때 "여의도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죠. 본인은 비정치적 화법을 사용하겠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화법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한 위원장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언어 스타일에 별칭이 붙을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체 이탈 화법'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본인이 행정부 수장이자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면서 "정부가 잘해야 한다"라고 마치 제3자인 양 이야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비선 실세' 최순실 씨와 문고리 3인방이 국정농단과 부패를 일삼고 결국 대통령 탄핵까지 이르게 된 된 건 유체 이탈 화법이 보여준 박 전 대통령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 행태 때문이었습니다.
승부사적 기질과 솔직한 성품을 상징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직설 화법도 인상적입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선거후보자 선출을 위한 한 경선 현장에서 '장인 좌익' 의혹에 아내를 변론하며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라는 연설로 판세를 뒤집은 일화가 대표적입니다. '노짱'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지만, 대통령 재임 시절 지지율 하락과 더불어 거침없는 정치 스타일이 오히려 시민들의 불안감과 불신을 키워 결국 정권을 내주게 되었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요인 중 하나도 특유의 사이다 화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지배자가 아니라 국민을 대표해서, 국민을 위해 일하는 머슴이요 대리인일 뿐입니다. (중략) 그런 그가 마치 지배자인 양, 여왕인 양, 상왕 순실을 끼고 국민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서 청중들의 가슴을 뻥 뚫어준 이 대표의 일갈이었습니다. 선명성을 극대화하는 말들이 지지층을 묶어내며 단번에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만들었습니다. 다만 지나친 팬덤정치에 대한 당 안팎의 우려 역시 이 대표의 정치 스타일이 초래한 또 다른 측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동훈 위원장의 화법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팩트 중심으로 말한다, 논리적이다,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평가하는 것 같고,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모질게 말한다, 독선적이다, 불편함을 준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언어가 '똑똑해 보인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겠지만, 진지함과 용기, 비전, 따뜻함, 위로와 같이 좋은 정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는 데에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겠습니다.
"너희 같은 XXX들을 오늘부터 공공의 적이라고 부르기로 했거든. 공공의 적!" 통쾌하게 봤던 기억이 남아있는 2002년 영화 <공공의 적>의 작중 대사입니다. 부패한 경찰이지만 흉악범과 같이 더 나쁜 놈들이 나타나면 갑작스레 정의 구현의 일선에 서는 인물, 설경구가 맡은 강철중 형사의 말입니다. '공공의 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나'와 '시민'은 한 편이고, 그 대척점에 함께 응징해야 할 '악'이 자리합니다. 이런 식의 구도를 가진 화법을 편의상 '강철중 화법'이라고 해보겠습니다.
한동훈 위원장보다 두 살이 많은 저는 70년대에 태어난 X세대에 속합니다. 한 위원장이 취임 연설문에 불러들였던 가수 서태지도, 또 다른 자리에서 언급했던 이창호 사범도, 조지 포먼 선수도, 히치콕 감독도 익숙한 세대죠. 한 위원장이 X세대의 문화와 취향을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상징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나 봅니다만, 정작 같은 세대인 저는 그의 화법에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한동훈 위원장의 화법을 저는 '강철중 화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 위원장이 즐겨 쓰는 '동료 시민'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국민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미국식 표현입니다. 그는 '폭주하는 다수당', '운동권 특권 세력', '개딸 전체주의' 등을 청산하고 응징해야 하는 공공의 적으로 상정하고, 자신을 이 동료 시민들과 한 편에 세우는 구도를 전제합니다.
저는 한동훈식 정치가 위험해 보입니다. 화법으로 볼 때 그의 정체성은 여전히 검사이고, 정치적 방향성은 칼잡이에 가깝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비정치적 화법은 결국 검찰의 언어이고, 공공의 적을 상정해야만 의미가 부여되는 안티테제의 언어이며, 그는 그 적을 소탕해야 하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로서 스스로 위치 지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가 상상하는 동료 시민까지 초청됩니다.
한동훈 위원장은 왜 민주당을 심판하는 데 자신의 칼을 써야 한다고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당의 변화는 민주당의 몫으로 남기고, 한 위원장은 국민의힘 내부, 당정관계, 보수진영 전반의 쇄신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각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는 곧 다가올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가 그렇게나 강조하는 동료 시민인 우리가 내리면 될 테니까요. 어쩌면 초엘리트인 그분이 보기에, 혹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시민이 아닌 걸까요?
[박해성 티브릿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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