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간토대학살, 9m 화폭에 되살아나다

노형석 기자 2024. 1. 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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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 50주년 기념전
신학철 화가 40여년 작업한 신작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대가인 신학철 작가가 최근 완성한 유화 대작인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가로 길이만 9m에 달하는 이 작품은 아르코미술관 창립 50주년 기념전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를 대표하는 주목작이다. 노형석 기자

사진은 역사를 가로지른 ‘오브제’가 되었다.

100년 전 일본 도쿄를 포함한 간토 지방에서 대지진 직후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담은 낡은 사진 하나. 이 유물 같은 사진 속 내용물들이 화가의 손끝 붓질을 업고 덩어리처럼 실물로 다가온다. 빛바랜 작은 사진 속에 갇혀있던 주검들이 전시장에 내걸린 거대한 그림의 화폭으로 튀어나왔다. 그 비참한 죽음의 실체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실제 풍경처럼 다시 꿈틀거리며 9m가 넘는 거대한 그림 위로 널브러졌다.

1974년 유신정부의 문화예술계 진흥을 명분으로 처음 창설된 옛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을 전신으로, 현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산하 전시공간이 된 아르코미술관 1층에 연말과 새해 벽두 펼쳐놓은 한국 리얼리즘 화단의 대가 신학철씨의 신작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은 압도적인 현장성을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아방가르드협회 시절부터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의 시작인 ‘현실과 발언’ 시절을 거치면서 그가 쌓은 사진몽타주와 극사실주의적인 역사적 풍경과 이를 가로지르는 초현실적 상징의 서사들은 올해 100주년을 맞은 간토대지진 학살을 맞아 새로우면서도 의연한 계승과 변모의 양상을 표출한다. 사지와 머리가 잘린 채 숱하게 쌓인 주검 더미들이 길게 이어진 가운데 이를 쿡쿡 막대기로 찌르는 일본인 자경단과 그사이 허연 사람 모양의 여백과 그 뒤로 일어나는 불길한 연기 등의 이미지 구성에서 역사적 현장 이미지들을 서사화하고 오브제화하는 작가적 역량이 농익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가로 길이만 9m에 달하는 이 작품은 아르코미술관 창립 50주년 기념전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를 대표하는 주목작이라고 할 만하다. 1980년대 아르코미술관의 전신인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 갔다가 한국근대사 100년을 담은 사진자료집에서 우연히 본 간토조선인대학살의 참사를 담은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40여년간 작업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전시장 1층의 일부 모습. 서용선 작가의 나무조형물 ‘농민’(2023·가운데)과 짝을 이룬 후배 김민우 작가의 얼굴상 ‘변용’(2023·왼쪽)이 나왔고, 오른편 안쪽으로 최진욱 작가의 그림도 보인다. 노형석 기자

지난달 8일부터 열리고 있는 이 기념전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는 아르코와 지난 50여년 인연을 맺은 한국 미술판의 원로 중견작가들과 소장작가들이 짝을 이뤄 전시장 곳곳에 배치한 구성이 흥미롭다. 조선인 학살의 참상을 거대한 가로그림으로 묘사한 신학철 작가의 대작은 눈이 멀거나 말을 못하고 귀로 듣지못하는 이들이 역사의 광명을 찾아간다는 서사적 구도를 보여주는 후배 작가 김기라씨의 오마주 영상과 맞은 편에서 기운을 주고받는다.

최근 전남 신안 창고와 서울 문화비축기지에서 20년대 암태도 항쟁의 역사를 담은 연작들을 전시 중인 서용선 작가는 이 연작들의 일부와 당시 항쟁한 농민들의 나무 조형물을 내놓았다. 후배 작가 김민우, 여송주씨는 암태도 연작의 회화적 맥락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얼굴 조형물과 당시 시대상을 풀어낸 애니메이션과 헌정 벽화 등을 만들었다.

거대한 ‘나방’을 여기저기 그려 놓고 섬약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혐오를 이야기하는 여성주의 작가 정정엽씨와 설문대 할망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와 여성신의 몸과 다기한 생명의 이미지들을 거칠고 원색적인 선으로 표현한 장파 작가가 짝을 이룬 2층 전시장 들머리의 풍경도 눈에 띈다. 이용백과 진기종, 박기원과 이진형, 서용선과 김민우·여송주, 조숙진과 이희준, 최진욱과 박유미, 채우승과 최수련, 홍명섭과 김희라 등 서로 전혀 몰랐거나 알아도 공동작업을 처음 하는 이들의 신작들이 도처에 이벤트처럼 출몰한다. 공성훈의 ‘개’ 연작, 김차섭의 ‘지도’ 연작, 조성묵의 의자모양 조형물 ‘메신저’ 연작 등 작고작가들의 수작들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전시장 2층 한가운데 벽을 뚫고 나온 얼개로 배치된 작고작가 조성묵의 의자모양 청동 조형물 ‘메신저’(1993·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작품이 뚫고 나온 벽의 안쪽 왼편에 김차섭의 ‘지도’ 연작이, 오른편에는 공성훈의 ‘개’ 연작이 각각 보인다. 노형석 기자

전시 제목은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들뢰즈의 책에 등장하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주름은 여러 접촉과 교류의 자취로서 앞으로 이어질 새로운 만남과 생성의 계기가 된다는 속뜻을 담았다. 전시를 만든 차승주 기획자는 “교류의 플랫폼 역할을 한 우리 미술관의 역사적 성격을 반영한 전시”라며 “중견 소장 작가 간 교류와 접촉의 결과물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 한국의 미술들의 여러 지점들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트렌드를 이끌어온 주요 작가들의 작업 흐름과 특징을 1~2층의 전시장을 오가면서 색다르게 파악할 수 있는 양질의 기획전으로 새해 미술판 전시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3월10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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