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중독자의 고백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책&생각]
어린 시절 빠져든 영어와 소설
자연스럽게 번역 한길로
“몸속 쌓인 소설들이 데이터…
이야기꾼이 이 업의 본질”
어쩌면 우리 인생은 어린 시절 강렬하게 남아 있는 몇 개 장면의 ‘각주’일지도 모른다.
노진선 번역가에게 하나의 장면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봤을 때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하는 영어에서 강렬한 노스탤지어를 느꼈다. 마치 멀리 떠나온 고향의 언어 같았다. 영어를 배우지 않던 국민학교 시절이었지만, 영어를 말하고 싶었다. 서점에서 영어 단어책을 찾아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 외운 단어가 ‘스패로우’(참새)였다. “내 입으로 처음 스패로우를 발음했을 때 희열이 아직도 생생해요.”
또 다른 장면은 친구 집에서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을 때다. 책을 워낙 좋아해 남의 집에 놀러 가면 일단 책장의 책부터 뽑아 읽던 아이였다. 옷장 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지는 눈 내리는 나니아 마을.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이야기는 그의 마음을 매혹시켰고, 귀가 시간이 다가올까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책장을 계속 넘겼다. 그때부터 청소년기 내내 ‘폭풍의 언덕’ ‘제인에어’ 등 영미권 소설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너무 좋았죠. 좋아하는 작품들을 원서로 실컷 읽을 수 있으니!”
숙명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잡지사 기자로 일했다. 외신 번역을 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편집장이 ‘번역을 잘한다’며 점점 그의 번역량을 늘려갔다. 전문적으로 번역을 공부하려고 성균관대 번역가 과정을 밟았다. 번역가 과정을 마친 뒤 내놓은 첫 번역작이 ‘만 가지 슬픔’이었다. 혼혈 고아의 시련과 성장을 다룬 실화 소설인 이 작품은 감동적인 서사뿐만 아니라 뛰어난 번역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2001년 출간 당시 한겨레도 ‘역자의 공들인 번역이 돋보인다’는 서평을 실었고, 독자들로부터도 많은 연락을 받았다.
첫 번역작이 이런 반응이니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안 맞나?’ 적성이나 재능을 묻거나 따질 필요가 없이 번역가의 길을 성큼 내딛게 됐다. 얼마 되지 않아 내놓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도 영화와 함께 ‘빵’ 터지면서 번역 의뢰가 끊이질 않았다. 피터 스완슨와 요 네스뵈 등 스릴러 거장들의 작품을 줄줄이 번역했고,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 ‘고든 램지의 불놀이’ 등과 같은 감각적인 스토리도 번역하는 등 지금까지 총 120여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소설 번역에 전매특허가 있는 그는 “청소년기에 몰두했던 영미 소설들이 데이터로 몸속에 쌓여 있어서 문장을 보면 자동적으로 번역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또 “작가는 필력이 좋아야 하고 번역가는 문장력이 좋아야 한다”며 “원문을 짐작할 수 없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귀띔했다.
‘인생작’으로 꼽는 책은 지난 2021년 출간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다.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가 있잖아요. 그 보편적인 감정을 다룬 소설로서 여러 대형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도 꼽히고 독자들에게 사랑도 듬뿍 받아 행복했습니다. 저도 중년의 위기를 겪을 때라서 주인공에게 확 감정이입이 됐는데, 너무나 위로를 받았어요. 내 삶에 잘못된 게 하나도 없구나, 지금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구나, 살아 있다는 게 굉장한 희망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그는 어렸을 때 친구들을 모아놓고 어제 본 드라마를 변사처럼 들려주는 걸 좋아했다. 친구들은 ‘직접 보는 것보다 네 얘기 듣는 게 훨씬 더 재밌다’며 환호했다. 그에게 번역이란 어릴 적 했던 변사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는 이야기 중독자예요. 이야기를 읽는 것도 듣는 것도 남에게 해주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재밌게 읽은 이야기를 남들에게 전해줬을 때 남들이 재밌어하는 거 그게 너무 좋은데, 번역으로 그걸 하고 있으니 ‘덕업일치’죠.”
그래서 번역작을 선택하는 기준은 늘 ‘재미’다. “작품의 5분의 1 정도를 읽어본 뒤 흡입력 있게 빨려 들어가면 번역을 결정해요. 번역하는 내내 책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데 재미가 없으면 괴롭거든요.” 오랜 시간 이야기 중독자로 살아온 그이기에 “특히 독창적이고 기발하고 반전이 있는 이야기에 탐닉”한다. 앞으로 판타지 소설을 많이 번역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게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야기는 일종의 은유죠. 이야기 속에 내가 있고, 삶도 있고, 다른 세계도 있죠.” 업(業)이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타인의 득(得)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는 탁월한 영문법 실력과 문장력으로 영어를 국어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과 재미를 주는 이야기꾼.’ 그것이 그가 어린 변사였을 때나 번역가인 지금이나 평생을 추구해온 업의 본질이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titleStyle1-%]
작지만 위대한 일들
흑인 간호사에게 내 아이를 맡길 수 없다? 병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흑백차별을 다룬 소설이다.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만큼이나 분노할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된다는 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뛰어난 필력의 작품”이라고 노 번역가는 추천했다.
조디 피코, 북폴리오(2018)
아메리칸 더트
멕시코 난민의 처절한 생존 여정을 다룬 소설. 미국 남쪽 국경을 넘어오는 난민들이 얼굴 없는 군중이 아니라 한명 한명이 개별적인 사연과 역사를 가진 개인들임을 보여준다. 노 번역가는 “다큐보다 현장감 넘치는 소설로 난민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제닌 커민스, 쌤앤파커스(2021)
먹을 때마다 나는 우울해진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당신의 상처를 말해준다. 40년간 섭식장애를 치료해온 임상심리학 박사의 심리서적으로 음식과 맺고 있는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고 개인의 무의식 상처를 치유하며 억압된 여성성을 일깨운다. “음식으로부터 감정을 떼어내어 음식을 순전히 음식으로만 보도록 도와주는 책.”
애니타 존스턴, 심플라이프(2020)
메이드
호텔 메이드가 호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추리 소설. 사회적 약자가 빛나는 순간을 매력적으로 그린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영화화가 확정됐다. 노 번역가는 “우영우 같은 자폐 여주인공의 우정과 성장을 다룬 따뜻한 소설”이라고 강추했다.
니타 프로스, 마시멜로(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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