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신작시집 창비 500호·문지 600호…반세기 쌓아 올린 ‘시의 거탑’

임인택 기자 2024. 1. 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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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기대작-문학

창비시선 ‘농무’ 후 49년만 500호
문지와 사회참여·순수문학 양갈래
김애란·이기호·황정은 새 장편
‘+10년’ 기다려 올 상반기부터
23년 노벨상·부커상 작가·작품
1년 만에 ‘실시간 국내 출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작가 김애란, 이기호, 황정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불가리아), 폴 린치(아일랜드), 욘 포세(노르웨이). 각 출판사·채널예스·부커상 위원회 및 한겨레 자료사진
창비시선 400번째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2016, 왼쪽)와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번째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2017)

시가 판매 금지된 시절이 있었다. 시집 ‘국토’(조태일), ‘꽃샘추위’(이종욱), ‘땅의 연가’(문병란), ‘북 치는 앉은뱅이’(양성우),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한국의 아이’(황명걸)…. 시를 쓰고 펴낸 ‘죄’로 고초도 겪던 시절. 이제 시는 (잘) 구매되지 않는다.

신작 시집 시리즈를 국내 최초로 시작한 창비시선이 올 상반기 500호를 내놓을 예정이다. 1975년 3월로부터 거의 반세기 만에 축성한 거대한 ‘시의 탑’이다. 이시영, 김사인, 김해자, 송종원, 박준 시인이 지난 시의 족적을 대표할 창비의 시들을 엮는다. 이시영(75)은 김지하 시인의 시집을 출간한 1982년 창비 편집부장으로 안기부에 연행됐던 이다. 그로부터 30년 뒤 펴낸 박준(41)의 첫 시집(문학동네)은 지금껏 판매고 20만부를 기록한 베스트셀러가 된다.

1978년 신작 시인선을 띄운 문학과지성사(문지)는 600번째 시집을 3~4월 내놓는다. 문지를 세운 4K(김현·김치수·김주연)의 1인으로 최고령 현역 평론가로 활동 중인 김병익은 최근 한겨레에 “문지 시인선을 시작하면서 4·19 세대 이전 시인들의 시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0년대 등단 작가들을 그렇게 피할 수 있었다”며 나아가 “1980년 전두환 군부 때 ‘문학과지성’도 폐간되고 88년 복간되었는데 새 인물, 새 이름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 이인성·정과리·홍정선 등 2세대(‘문학과사회’)로 넘겼다”고 말했다.

지난 반세기 한국 현대시의 숲을 이룬 자 셋이다. 창비시선, 문지 시인선, 그리고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1974년 시작, 시인의 대표시를 모은 시선집). 출발이 늦은 문지가 2017년 500호에 먼저 닿았다.

올해 문학계의 기대작 목록은 바로 창비와 문지가 가진 명암 그대로의 시적 기록 자체로 시작되어야겠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에 현재가 빚졌다면 1980년대의 또 다른 별칭인 ‘시의 시대’에도 현재는 빚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은 2018년 4월 시작한 핀 시리즈 100번째를 올 2월 맞는다. 매달 25일 순·장르 소설, 시 단행본을 한 권씩 번갈아 출간해왔다. 100번째 주인공은 시인 구현우의 2월 시집.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는 어렵지 않냐고 물을 만하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2020)의 감성 시인 이원하가 두번째 시집(문학동네)으로 봄을 맞는다.

소설 부문에선 김애란 작가가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에 내놓는 두번째 장편소설(문학동네)이 기대를 모은다. ‘거짓말’을 테마로, 상반기 출간 목표다. 황정은 작가의 새 장편소설(문지)도 하반기 예고되어 있다. 2014년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이후 10년 만이다. 2022년 하반기 연재 중단한 것과 전혀 다른 소설이 될 전망이다.

망설일 까닭 없는 작가군으로 김솔, 이서수, 안보윤, 김멜라 작가가 신작 출간을 준비 중이다. 중·장편으로 모두 현대문학 띠지를 두른다. ‘삼국지’ 속 가공인물인 초선을 장군들과 나라를 움직인 프로타고니스트로 그린 박서련 작가의 장편 ‘폐월’은 일제강점기 고공농성 투쟁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 한겨레문학상(2018)을 받았던 ‘체공녀 강주룡’의 기풍을 예감하게 한다. 5월 은행나무.

지난해 예고와 달리 마감되지 못한 기대작들을 살펴본다. 윤흥길 작가의 20년 역작 ‘문신’의 완간이 올 3월, 9년 만의 신작 장편으로 만날 줄 알았던 이기호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이 10년 만의 장편으로 올 하반기 예정하고 있다. 작가들에겐 기나긴 글빚의 수형이겠으나, 독자에겐 조금 더 기다리는 즐거움일 수도. 지난해 소설가 최진영의 ‘단 한 사람’은 계약한 지 10여년 만에 나왔다. 그사이 작가가 던졌어야 할 질문은 더 많아졌겠다.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는 타임슬립, 영혼교체라는 마력적 콘셉트로 청소년소설 ‘네가 되어줄게’(문학동네)를 펴낸다. 엄마와 딸이 각각 중학생이던 1993년, 2023년 배경의 상대를 체험하게 된다.

흥미로운 산문집은 한겨레출판 쪽에서 보인다. ‘나의 폴라 일지’는 소설가 김금희가 남극 세종기지에 머물며 극지 동식물과 연구자, 삶과 깨달음을 기록해 펴낼 세번째 산문집이다. 11월 예정. 시인 문보영은 ‘아이오와 일기’(가제)에 미국의 문학 도시라 불리는 곳에서 건진 단상들을 모은다. 매일 길거리 서점에서 낭독회가, 즉흥시 창작이 열렸다고 한다.

국외 작품으로는 ‘바닷가의 루시’가 눈길을 잡는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68)의 장편으로 단골 주역 ‘루시 바턴’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도시를 떠난 루시로부터 소설은 코로나 팬데믹의 고독과 죽음, 더불어 미국을 흔들었던 조지 플로이드 사건, 연방의사당 폭력 점거 등까지의 첨예한 현안을 다뤘다. 올가을 소설이 소개(문학동네)될 즈음 세계 판세를 좌우하는 미국 대선도 바투 윤곽을 잡아갈 것이다.

늦봄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85)의 단편집(황금가지), 늦여름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72)의 소설(민음사)도 기다려진다. 프랑스 인기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난해 6월 방한해 직접 충무공 이순신으로부터 일부 영감 받은 신작으로 “한국어 번역 중”이라 알렸던 ‘퀸의 대각선’도 올 7월 출간된다.

해외 문학상의 기세는 더 커지고 있다. 사실 문학 출판이 위축되며 수상작 쏠림이 커 보이는 것이다. 2023년 부커상을 받은 아일랜드 작가 폴 린치(47)의 ‘예언자의 노래’(가제),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인 ‘타임 셸터’(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은행나무, 문학동네에서 11월 이후 독자를 찾는다. 우경화하는 아일랜드 정치사회 환경에서 스택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엘리스) 등을 그린 ‘예언자의 노래’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 폴 하딩의 작품과, 불가리아 작가의 ‘타임 셸터’는 천명관의 ‘고래’ 등과 다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23년 노벨문학상 작가 욘 포세(65)의 최신작 ‘샤이닝’도 가을께 국내 선보일 전망이다. 2023년 작품이 1년 만에 소개(문학동네)된다. 기호로만 본다면, 노벨문학상, 공쿠르상에 견줘 부커상 쪽 취향이 국내 대중과 조금 더 맞아 보이긴 한다. 그중 상업화된 때문이겠다. 이밖에 일본 나오키상·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받은 나가이 사야코의 ‘고비키초의 복수’를 3월 은행나무가 소개한다.

지난 100년 한국 여성문학 중 주요 작품을 선별하는 ‘여성문학선집’(7권, 민음사, 2월), 첫 동성·양성애자로 영국 계관시인이 된 스코틀랜드 시인 캐럴 앤 더피(69)의 시선집(문지), 마블코믹스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작가 배리 윈저 스미스가 2021년 발표한 생애 첫 그래픽노블 ‘몬스터’(교양인) 등이 ‘처음’이란 공통어로 올해를 준비 중이다.

2023년 가장 많이 팔린 문학 신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문학상도 아니고, 시대 감각도 아닌 이 작품과 같이 올해 또 어떤 작품이 문학적 사건의 주인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판매고만으로 결정되는 일도 아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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