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입을 닫고 고개를 든 새해맞이

관리자 2024. 1. 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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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기로 감싸인 적적한 그림엔 소나무 한그루가 의젓하다.

숱한 푸나무가 우거져도 늘 혼자인 존재가 곧,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한 소나무다.

그림 오른쪽 아래 있는 작은 글씨를 살펴보면 누군지 드러난다.

소나무 아래 홀로 앉은 그림 속 주인공에게 한 소식 듣고자 해도 그는 결단코 군소리할 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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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머나먼 곳 찌를듯한 시선
시비에 걸려들지 않으려는 의지
비타협 원칙주의자 화가와 겹쳐
좌정과 묵언에 알맞은 요즘 시기
굳이 말할땐 침묵보다 나은 말을
이인상의 ‘송하독좌’(1754년, 종이에 먹, 80×40㎝,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냉기로 감싸인 적적한 그림엔 소나무 한그루가 의젓하다. 숱한 푸나무가 우거져도 늘 혼자인 존재가 곧,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한 소나무다. 너럭바위에 앉은 사내의 발아래는 아무렴 절벽일 테다. 저 소나무는 낭떠러지에 검질기게 뿌리박고 헌걸찬 모양새를 보인다. 묵은 세월의 고초를 끌어안은 용 비늘의 몸통은 한껏 솟으려 하고, 풀린 실타래처럼 늘어진 겨우살이는 휜 가지 사이를 넌지시 파고든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든다 해도 소나무의 자존심이 흠 잡히겠는가.

그림 속 주인공의 위엄이 심상찮다. 마냥 얼굴을 치켜든 그의 시선이 머나먼 곳을 찌를 듯하다. 인기척 드문 산중 따위는 아랑곳없이 좌정한 모습이 단출하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함이 감도는 공간이지만 그의 표정엔 허튼 감상은 티끌도 안 보인다. 오로지 댕댕한 기색이 어렸다고 할까.

예부터 이런 자세를 일컫는 말이 내려온다. 시답잖은 눈빛으로 세상을 깔보는, 이른바 ‘백안시(白眼視)’가 그것이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손을 공손히 무릎에 올렸지만, 빳빳하게 세운 사내의 고개에서 시비에 걸려들지 않으려는 마음 먹기가 오롯한 게 보인다.

이 작품 ‘송하독좌(松下獨坐)’를 감상하자니, 마침맞게도 비타협적 원칙주의자로 살아온 화가가 겹쳐진다. 그림 오른쪽 아래 있는 작은 글씨를 살펴보면 누군지 드러난다. “원령취사 갑술제야(元靈醉寫 甲戌除夜).” 풀이하면 ‘원령이 취해서 그리다. 갑술년 섣달그믐날 밤’이다. ‘원령’은 이 그림을 그린 이인상의 자(字)이고, 갑술년은 1754년이다. 이인상 생애의 말년인 45세 되던 그해 마지막 밤, 술잔을 기울이다 마음이 내켜 불쑥 붓을 들었다는 얘기다. 당시는 음력을 쓰던 시절이니 ‘제야’는 설을 하루 앞둔 날이다.

희망이 동트는 새해 새 빛을 맞이하기까지 코앞인데, 화가는 무슨 회포에 휘둘려 이토록 쌀쌀맞은 그림을 남겼을까. 그것도 그믐날 밤술에 취한 채로 말이다. 소나무 아래 홀로 앉은 그림 속 주인공에게 한 소식 듣고자 해도 그는 결단코 군소리할 이가 아니다. 가는 해의 끝 밤에 잠들지 않고 꼬박 새우는 풍습을 ‘해지킴(守歲·수세)’이라 한다. ‘이 밤에 잠들면 눈썹이 센다’하여 이인상은 밤이 지새도록 술동이를 끌어안았다. 제야에 쓴 그의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저 두렵기는 닭이 새벽 재촉하는 것뿐/ 해 보내는 밤에 술항아리 모자라지나 않았으면.”

이인상은 만년에 매몰스러웠다. 애써 교제를 끊고 참견을 피했다. 욕망을 좇아 부나비처럼 날아드는 군상이 그 눈에 하찮았다. 날뛰고 떠들어야 할 까닭이 없던 이인상은 ‘송하독좌’를 그린 그해 은거할 곳을 마련했다. 새로 써 붙인 좌우명이 이렇다. “꾸밈은 실질보다 헛되지 않고, 행위는 명예를 좇지 않는다.”

좌정과 묵언에 알맞은 날은 묵은해와 새해가 오가는 어름이다. 될수록 고개는 치켜들자. 부끄러운 사람과 겁먹은 짐승이 머리를 처박는다. 입 모양을 안 그린 화가의 속내도 헤아리자. 굳이 말을 하려거든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해야겠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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