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물 한 통 건네자 "이렇게 귀한 것을…" '방재 대국' 일본 강진에 우왕좌왕
도로 갈라져 지원 물자 수송 늦어져
4일 기준 84명 사망… 골든타임 지나
"아니 이렇게 귀한 것을… 정말 저한테 주셔도 돼요?"
새해 첫날 덮친 규모 7.6 강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인 일본 이시카와현 와지마시. 지난 3일 오후 6시 시청 1층에 마련된 피난소에서 만난 20대 여성에게 취재를 마친 뒤 배낭에 있던 600ml 페트병 보리차를 건네자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마실 물은 충분하다"며 사양 말라고 했지만 이 여성은 "정말 괜찮나요"라며 여러 번 되물었다. 다시 보리차를 건네자 그는 정말 감사하다며 물병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이 여성뿐만이 아니었다. 취재 중 만난 피난민에게 같은 날 오전 가나자와시 편의점에서 사온 보리차를 건넬 때마다 놀라며 기뻐했다. 현재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는 질문에도 이구동성으로 물이라고 말했다.
지진이 덮친 노토반도 일대 약 11만 가구에서 사흘째 단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산간 지역에서 만난 한 피난민 가족은 산에서 샘물을 떠 와 식수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쌓인 눈을 녹여 마시며 생활하는 사람마저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도 나왔다.
물·식료품 부족...난방도 안 돼 추위에 떨어
일본은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등이 자주 일어나는 '자연재해 빈발 국가'인 동시에 재난 대비와 수습에서 모범을 보이는 '방재(防災) 대국'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지진 발생 직후부터 매일 비상재해대책본부 회의를 개최하고 기자회견을 하며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번 강진 현장에선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물과 식료품 지원이 지연되고 있었다.
지원 속도가 더딘 것은 열악한 도로 사정이 일차 원인이다. 일본 정부는 와지마시에서 114km 떨어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지원 물품을 모으고 수송하는 거점을 마련했다. 평소 가나자와시와 와지마시 사이는 자동차로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지만, 3~4일 이곳을 오가는 데는 각각 6시간과 8시간이나 걸렸다.
지진이 난 뒤 노토반도 도로 곳곳은 크게 갈라지거나 무너졌고, 산사태로 인한 흙더미에 뒤덮인 곳도 많다. 통행이 금지된 구간이 80곳을 넘는다. 모든 차량이 거북이걸음을 하며 이동하고 있었지만 갈라지거나 파인 곳에 타이어가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 차량도 곳곳에서 마주쳤다.
도로 붕괴 위험이 크기 때문에 4톤을 초과하는 대형 트럭은 통행할 수도 없다. 지원 물품 대량 수송이 어려운 이유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와지마시와 스즈시는 모두 해안 마을이다. 해상 수송이 가장 신속한 방법일 수 있지만, 첫 수송선은 5일 저녁에나 와지마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헬기를 활용한 지원물자 수송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물자 부족을 호소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커지자 4일 예비비를 과거 재해에 비해 2배로 늘리고 물자 수송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2,000명이었던 자위대 투입 인원도 이날부터 4,600명으로 늘렸다.
일본 정부 수습 총력전...도로 사정에 지원 늦어
고령화율이 높은 이시카와현에선 4일 현재 3만4,100명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 중이었다. 그런데 일부 피난소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추운 겨울 난방조차 없이 떨고 있는 고령자도 다수다. NHK는 "피난소로 지정된 체육관이나 학교 등은 바닥이 차가우므로 저체온증이 일어나 최악의 경우 생명을 잃을 위험까지 있다"는 전문가의 주의를 전했다.
현지에서 만난 40대 여성 피난민은 인근 고마쓰시에 거주하면서 연말연시를 맞아 와지마시에 사는 어머니 집에 왔다가 지진을 겪었다. 열악한 피난소에 어머니만 놔두고 돌아갈 수 없어 함께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이 여성은 "피난 생활이 길어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수많은 주택이 무너지고 화재로 초토화되는 등 피해가 컸던 와지마시와 스즈시 두 마을은 아직도 지자체가 붕괴한 가옥 수 등 전체 피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들 마을 주택 내진율(51%)이 전국 평균(87%)보다 크게 낮은 반면 고령화율(51%)은 매우 높았다고 보도했다. 최근 잦은 지진으로 약해진 건물을 보수하지 않은 집이 많았던 점을 '괴멸적 피해'가 발생한 원인으로 꼽았다.
1일 발생한 강진으로 인한 이시카와현 내 사망자 수는 이날까지 84명으로 파악됐다. 지역별 사망자 수는 와지마시 48명, 스즈시 23명, 나나오시 5명 등이다.
일본 당국은 인명 구조에서 '골든타임'으로 여겨지는 지진 발생 이후 72시간(4일 오후 4시)을 염두에 두고 이날도 무너진 집에 갇힌 주민 등을 구출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지금까지 156명을 구조했다"며 "72시간이 지나는 오늘 저녁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와지마(이시카와현)= 최진주 특파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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