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해, 대만이 세계 질서 첫 시험대...사실상 美中 대리전
4일 저녁 대만 신주현(縣) 주베이시의 카르푸 매장 앞 대형 주차장. 13일 총통 선거에 출마한 민진당의 라이칭더(賴淸德·65) 후보가 5000여 명의 인파 앞에 서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반도체 산업은 (미국 등) 세계 민주 국가들이 공유하는 산업 공급망으로 얽혀 있다”고 강조해온 그가 투표일을 9일 앞두고 ‘반도체의 도시’를 찾은 것이다. 신주엔 대만을 지키는 ‘호국신산(護國神山)’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업체 TSMC가 있다. 무대에 오른 라이칭더가 “대만이 미래로 향할지 과거로 돌아갈지, 세계로 나아갈지 중국에 갇혀 살지, 민주를 지킬지 권위주의를 택할지 전 세계가 보고 있다”고 하자 지지자들은 일제히 “하오(好, ‘옳소’)”라고 소리쳤다.
라이칭더의 경쟁 후보인 대만 제1야당 국민당의 허우유이(侯友宜·67) 후보도 새해 첫날 같은 도시에서 유세했다. 그는 “나는 유일하게 중화민국을 수호할 수 있는 후보”라고 했다. 라이칭더는 친미(親美) 독립파, 중국 본토가 지지하는 허우유이는 친중(親中)으로 분류된다.
40여 주요국 선거가 연중 잇달아 열리는 2024년, 대만 유권자들이 총통을 뽑으며 선택의 첫 테이프를 끊는다. 대만 선거는 G2(미국·중국)의 기술 굴기, 해양 패권, 이념 경쟁이 맞붙는 가운데 열려 세계 안보에 결정적 변수가 될 전망이다. 대만 유권자가 친미·독립 노선을 내세운 여당 민진당을 선택할지, 적나라한 친중 노선을 내세운 국민당을 선택할지에 따라 세계 정세는 다른 방향으로 요동칠 수 있다.
대만 총통 후보는 라이칭더·허우유이와 제2야당인 민중당 커원저 등 세 명이다. 지난해 11월 허우유이와 커원저가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하면서 선거 결과를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TVBS가 지난달 30일 조사해 다음 날 공개한 여론조사에서는 반중 성향 라이칭더 후보 지지율이 33%, 친중 허우유이 후보는 30%, 중도로 분류되는 민중당 커원저 후보는 24%였다.
13일 대만 유권자들은 총통·부총통, 지역구 입법위원, 비례 의원(정당별 투표) 선거에서 각각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대만 선거는 러시아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국가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열린다. 친미·반중인 지금의 민진당 정권이 재집권해 미국과 더 밀착한다면 중국의 대만 압박이 강해질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친중 정권이 들어설 경우 안 그래도 고전(苦戰) 중인 자유 진영이 또 하나의 ‘아군’을 잃으며 세계 질서의 균형이 더 무너질 위험이 있다.
대만 우자오셰 외교부장(장관)이 4일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최근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충돌하는 가운데 대만 선거는 이 전쟁의 최전선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이유로 대만 선거는 사실상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말 미국은 대만의 전술 정보 시스템을 지원한다며 3억달러(약 3900억원) 규모의 장비 판매를 승인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신년사에서 연이어 ‘대만 통일’을 언급하며 민진당이 재집권할 경우 군사 위협을 예고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대만은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인 TSMC가 있는 곳이다. 전문가들은 TSMC가 계속 서방 공급망 안에 존재하느냐, 아니면 끝내 중국 품에 안기느냐에 따라 AI(인공지능) 등 미래 기술 주도권이 요동칠 것으로 본다.
현장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며칠 뒤 행사할 한 표가 국가 운명을 결정지을 것임을 아는 듯했다. 민진당 유세현장에서 만난 지지자 황모(52)씨는 “대만이 다시 중국에 발목 잡히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민진당의 샤자(下架·진열대에서 내리는 일)를 막기 위해 친구들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반면 신베이 출신으로 집안 전체가 국민당 지지자라는 궈모(63)씨는 “대만 반도체도 중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라며 “현실을 못 보는 민진당이 장기 집권하면 대만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후보들 역시 선거 최대 쟁점인 중국 본토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내가 안보 보장을 위한 최적임자”라고 각각 주장하고 있다.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는 “대만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은 중국”이라고 하고,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 진영은 “(중국을) 형제라 한 번 부르면 백 세까지 평안하다”고 하고 있다.
라이칭더 후보는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92공식(하나의 중국은 인정하되 양측이 각자 다른 명칭을 쓰기로 한 합의)’에 대해서도 3일 신베이 유세 현장에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면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주권 포기”라고 했다. 대만 독립 의향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는 지난달 30일 TV 토론회에서 “나는 첫째 대만 독립에 반대하고, 둘째 민주·자유 제도를 고수하며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제도)에 반대한다”고 강조했고, 1일 신주 유세 현장에선 “후보 중 나만 대만 독립을 명확히 반대한다”고 했다. 군사 부문에서도 라이칭더는 ‘침략자의 선의’를 믿지 말고 ‘전쟁 준비를 통한 전쟁 회피[備戰來避戰]’를 추구하자고 하는 반면 허우유이는 대만 독립을 반대해 대만해협 현상 유지 및 질서를 이루겠다는 입장이다.
민중당 커원저는 양측을 절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4일 신주현 민진당 유세 현장에서 3.5㎞ 거리의 수이전삼림공원에서 맞불 유세를 펼친 커원저 후보는 오후 8시 30분쯤 무대에 올라 “왜 우리가 싱가포르에 뒤처졌나. 국가가 올바른 궤도에 오르지 않아서 그렇다. 민진당과 국민당은 서로를 봐주는 기득권 당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야권의 허우유이·커원저 후보는 당초 단일화를 논의했지만, 작년 11월 총통 후보 등록 마감 시한을 하루 앞두고 무산됐다. 단일화 논의 도중 민중당 커원저 후보가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에게 ‘(무소속) 궈 후보의 체면을 살려주고 사퇴 명분을 줘야 한다’고 보낸 문자메시지를 허우유이 후보가 공개적으로 읽는 진흙탕 싸움도 벌어졌다. 당시 커 후보는 “사적인 문자를 공개하는 것은 총통이 할 일이 아니다”라며 반발했다. 문자에 등장한 ‘궈 후보’란 전자기기 생산 기업 ‘폭스콘’의 창업자 궈타이밍으로, 출마했다가 지난해 11월 말 사퇴했다. 국민당·민중당 두 후보가 힘을 합친다면 민진당을 이길 가능성이 크겠지만, 중화권 언론인들은 이 두 후보의 막판 단일화는 당내 이해관계 등으로 인해 어렵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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