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판 권력’만 키운 서울대 법인화… 연구·교육 대신 행정 처리에 예산·시간 낭비
‘누가 조국(祖國)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서울대를 나라 발전에 기여하는 지성의 전당으로 기대할 때 인용하던 시 구절인데 요즘은 정반대의 비하적 의미로 종종 쓰인다. 교육부 감사 등에서 드러난 도덕적 해이와 후진성, 시대 변화에 뒤떨어진 대학 교육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세계 일류대학으로 도약하겠다며 2012년 법인화했다. 2024년 QS 세계 대학 평가에서 41위로, 2012년 37위보다 더 내려갔다. 당시 44위로 서울대보다 낮았던 베이징대는 17위, 싱가포르대는 25위에서 8위로 올라섰다. 서울대 위기를 강도높게 진단하면서 새해에 교수 주도의 서울대 혁신을 선언한 임정묵 서울대교수협의회 회장을 인터뷰했다.
-서울대 내부에서는 위기를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나.
“대학 평가라는 정량적 지표가 전부는 아니지만 상위 0.5%의 인재를 선발하는 서울대가 아시아 경쟁 대학에 밀리고 국내에서도 카이스트, 연세대나 성균관대 등과 비교해서도 위기감을 느낄 정도이니 심각한 상황이다. 교수당 논문피인용 횟수(2021년)는 하버드와 MIT를 100이라고 할 때 도쿄대 90.6, 싱가포르대 89.5인데 서울대는 75점 수준이다. 이공계열 교수 1인당 연구비는 카이스트의 79.4%에 불과하다.”
-세계 일류 대학으로 도약하겠다고 법인화해놓고 왜 이렇게 됐나.
“법인화의 핵심이 자율성인데 ‘고비용 저효율’의 관료주의만 심해졌다. 성급히 추진하다보니 구시대적인 학칙과 규정들을 손보지 않은 채 부실한 법인화로 출발했다. 재원도 부족했다. 지난 10여 년간 대학 등록금이 동결된 상황에서 정부 출연금 비율이 매년 1%씩 늘어나 정부 의존도가 2018년 53%에서 2023년 57%로 높아졌다. 법인화 이후 운영성과 평가가 생겼는데 직원들이 평가 준비만 몇 달씩 매달린다. 대학의 경쟁력은 교수 연구력과 학생 능력의 배양에서 나오는데 서울대는 정부 예산 지원 기준에 맞춰 점점 더 관료화됐다. 전임교원이 2150명쯤 되고 비전임교원까지 합하면 교원은 3100명인데, 직원이 정규직 1000명, 비정규직 2000명으로 3000명이나 된다.”
-교수들이 직원들로부터 일대일 지원을 받으며 연구와 교육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얘기 아닌가.
“그게 아니다. 주요 사립대는 많아야 정규직 400~600명 규모로 운영된다. 경쟁 대학 몇 개를 합친 것보다 직원 수가 많다. 교육과 연구에 투입되어야 할 예산의 상당 부분이 비효율적인 행정 처리로 낭비된다는 의미다. 카이스트, 고려대, 성균관대의 교원 1인당 연구비가 지난 10년간 67~97% 증가했는데 서울대는 0.7% 감소했다. 대학 내에 위원회만 100개가 넘는다. 2~3단계로 결재할 것을 20단계 거치는 것도 있다. 전산 시스템도 엉망이다. 교수들이 직접 인터넷에 공무 외 출장 신고를 하면 될 것을 직원이 종이에 인쇄해서 결재 올린다. 종이로 비치 안 하면 교육부 감사에서 지적받는다. 규제와 요구만 남발하는 대학 운영에 교수들도 불만이 많고, 직원들도 고달픈 구조다.”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나.
“우선 시급한 게 행정 혁신이다. 복잡하고 낙후된 행정 전산 시스템을 폐기하고 교수 스스로 교학 행정을 처리할 수 있게 원스톱 전산 시스템부터 구축해야 한다. 100개도 넘는 위원회를 줄이고 종이 대신 전자문서를 공용화해야 한다. 중소기업들도 도입한 전사적관리시스템(ERP)으로 행정을 쇄신하려는 시도조차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내부 칸막이가 심해 정보의 투명성도 결여돼 있다. 계약직 인건비는 단과대나 연구소별로 운영비에 반영돼 있어 본부 데이터로는 알 수도 없다. 원스톱 행정처리 시스템 등으로 비용을 대폭 줄이고 재정의 투명성을 높여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써야 한다.”
-법인화 이후 경영 마인드를 도입하지 않고 폐쇄적 순혈주의를 고집하다 위기를 자초한 것 아닌가.
“총장이 총괄하는 3개 기관(서울대, 서울대병원, 서울대치과병원)의 총자산이 9조8000억원, 인원은 2만2000명으로 대기업에 준하는 방대한 조직이다. 하지만 기업 경영에 비교하면 1980년대나 1990년대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대학 지배구조의 핵심은 총장과 대학본부, 그리고 이사회다. 총장 임기 4년 동안 본부 보직자가 2년마다 바뀐다. 보직 교수들도 본업은 연구와 교육이어서 짧은 임기 동안 복잡한 대학 행정을 샅샅이 파악하기 힘들다. 예산 확보, 운영성과 평가 등 주요 행정 업무를 직원들한테 “알아서 하라”고 맡길 수밖에 없어 ‘교수와 학생이 주인’인 대학이 아닌 ‘결재판 권력’이 커졌다. 행정 혁신에 이어 인사 혁신, 조직 혁신도 해야 한다.”
-이런 위기에도 서울대는 외부에서 능력 있는 총장을 모셔오겠다는 시도조차 안 한다. 지난해에야 삼성전자 CEO 출신의 권오현 이사장을 영입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기업 출신이라 그런지 서울대 문제점을 빠르게 파악하시더라. 하지만 서울대 법인 이사장은 임기가 2년밖에 안 돼 평균 임기가 긴 사립대 이사장에 비해 제약이 많다. 캠퍼스 구석에 있는 이사장실이 이사회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버드대나 카이스트는 이사회 중심의 간선제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한다. 서울대 이사회가 독립적인 총장 선출과 안정적 재정 수익을 관할하려면 이사장 권한을 높이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임 가능하게 이사장 선임제부터 개정해야 한다.
근본적인 지배구조 개편이 실현되기 전이라도 4년 임기 총장의 리더십으로 개혁할 수 있는 것도 꽤 있다. 서울대 위기론이 팽배한 가운데 작년에 취임한 유홍림 총장은 개혁에 상당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학령 인구 급감으로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대학 서열화의 최상위에 선 서울대가 한국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과 공생에도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작년에 고등교육 예산(13조5000억원)의 4.1%인 5492억원이 서울대에 지원됐다. “서울대가 자신만을 챙긴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울대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고 교수들이 솔선수범해서 변해야 한다. 우리나라 고등교육 혁신의 첫 단추로 서울대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서울대를 이대로 방치하면 리딩 대학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국가가 투입한 천문학적 예산과 확보된 인적·물적자원을 내버리는 꼴이 된다.”
-서울대 폐지론도, 국립대 네트워크를 통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방안도 나온다.
“1980년대 학령인구 100만 시대에 설립된 400여 개 대학들이 머지않아 도래할 수험생 15만명 시대에 어떻게 생존할지 고민해야 한다. 결국 대학 전체가 클러스터 중심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울대의 교육·연구 인프라를 다른 대학에 개방하고 공유해서 지식 기반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도록 만드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간 학점 교환 및 온라인 공동 강의, 공동학위제를 활성화할 필요도 있다.”
-말만 무성했지, 개혁 실행은 미흡했다.
“서울대가 재원을 확보해서 정부 의존도를 낮추려면 꽤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스스로 쇄신하는 모습부터 보인다면 교육부도 대학과 교수를 옥죄는 각종 규제를 완화해서 자율성과 재정 운영의 유연성을 높여주어야 혁신이 급물살을 탈 수 있다. 서울대가 재정 자립도를 높여 국민 세금이 덜 투입된다면 그 재정을 다른 대학을 지원하거나 지식 기반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교수협의회는 어떤 역할을 할 건가.
“교수들의 연공서열 철밥통부터 깨려고 한다. 일 열심히 하면 많이 받아가는 구도로 바꾸자고 대학 본부에 제안할 예정이다. 교수들이 먼저 변해야 대학의 변화를 촉진하는 촉매제가 된다. 우수한 교수진을 영입하기 위해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는 ‘신진 석좌교수제’ 도입도 제안할 계획이다. 교수부터 철밥통 내려놓아야 무려 1~8급에 이르는 직원 직급도 단순화해서 인사 개혁을 해나갈 수 있다. 비장한 각오로 교수협의회가 개혁에 앞장서 관철하겠다.”
☞임정묵 회장은?
서울대 교수협의회는 1960년 발족해 64년의 역사를 지닌, 전체 교수들의 자치 단체다. 3년 임기의 회장은 직선제로 선출된다.
임 회장은 서울대 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오카야마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루이지애나대 연구원, 차의과학대학을 거쳐 2000년부터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 생명윤리위원회 창립위원, 연구부처장 및 시흥캠퍼스 설립지원단장을 지냈고 2016년부터 교수협의회 상임이사로 활동한 인연으로 2022년 제35대 교수협의회 회장에 당선됐다. 서울대 교수노조위원장도 겸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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