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등기우편으로 도착한 수상소감

이영관 기자 2024. 1. 5.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집 제목에 반감이 든 건 오랜만이었다. 장이지 시인이 2주 전 낸 ‘편지의 시대’. 연하장 대신 휴대폰 메시지가 오가는 요즘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홀로 편지를 쓰는 이의 이야기다. 편지가 상대에게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왜 우리는 이 작은 테두리 안에 쓸 말을 찾아 헤맬까’라며 묻고,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며 ‘편지란 비어 있어서 우리가 거듭해 꿀 수 있는 꿈’이라 말한다. 떨림이 느껴졌다. 내 편지가 닿았는지, 그의 답장이 언제 올지 몰라 기다리는 순간의 잔잔한 심장 박동.

생각해보면 편지의 상실은 기다림의 상실과도 같다. 즉각적 반응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편지처럼 기다림이 필요한 것들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지기 쉽다. 식당 앞에 무인 기계를 두고 휴대폰으로 알람을 받게 하는 방식이 그렇다. 기다리는 수고를 줄일 수 있지만, 편리함이 모두에게 최선은 아니다. 압구정의 한 식당을 찾았다가 놀란 적이 있다. ‘대기 번호 61번’. 숫자보다 놀란 것은 생각보다 식당에 빨리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노쇼’가 많았다. 식당 주인은 기대보다 손님을 덜 받았겠고, 일부 손님은 지레 겁을 먹고 다른 식당으로 갔을 테다.

기다림이 없는 시대에서 가능성의 폭은 좁아지고 있다. 불가능한 것도 기다리면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노력이 언젠가 보상을 받고, 나를 성장시키는 자산이 될 거란 막연한 기대였다. 저성장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지금과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지만, 아쉬움은 있다. 어쩌면 우리 삶의 가능성이 지금보다 더 클 수 있음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한창인 대학 입시도 마찬가지다. 구독자 110만 명의 한 유튜버가 진행하는 입시 상담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의치한약수’란 말이 자주 나온다. 의학 계열의 대학 학과 이름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 이를 희망하는 상위권 학생에게 “왜”를 물으면, “다른 곳 가기엔 점수가 아깝다” “하고 싶은 건 다른 건데, 부모님의 압박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학생도 물론 있지만, 고수입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특정 학과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그들이 맞이할 미래를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당장 지금 ‘가성비’가 떨어지거나, 경쟁에서 뒤처지면 불가능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손가락질하니까.

고백하자면 기자도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몇 달 전, 한 시인이 수상 소감을 “우편으로 보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당황했다. 기사 마감 일정이 촉박함을 설명하자, 그는 ‘빠른 등기’로 우편을 보냈다. 평소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 모든 걸 손으로 쓴다고 했다. ‘일상을 잃어버린 듯 산 몇 년 동안’을 고백하며 시작하는 그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글씨는 삐뚤었지만 그가 시를 썼을 인고의 세월이 그 어떤 글씨보다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앞으로도 ‘편지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향해 무언가가 오고 있다는 기대로 삶은 조금 따뜻해질 수 있다. 평생 오지 않을 만남일지라도.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