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새해계획표에 '적당한 빈틈'도 넣자

양지훈 변호사(위벤처스 준법감시인) 2024. 1. 5. 02:03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내가 속한 테니스클럽에서 최근 열성회원 한 명이 모임을 탈퇴하겠다는 아쉬운 소식을 전했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열심히 산다는 말이 나는 너무 어색하다. 열심히 일한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열심히 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특히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 한국인들이 비경제적인 것, 비생산적인 것에 어떠한 노력과 비용도 들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뗄 수 없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지훈 변호사

내가 속한 테니스클럽에서 최근 열성회원 한 명이 모임을 탈퇴하겠다는 아쉬운 소식을 전했다. 탈회의 이유는 주말마다 부동산 임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토요일 모임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매물을 보기 위해 부동산카페의 회원들과 매주 어딘가를 나가야 하므로 우리 모임을 '버린' 것이다. 테니스가 주는 당장의 즐거움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수고로움을 택한 그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렇게 좋아하는 테니스를 버릴 만큼 매주 임장을 나가는 것이 그에게는 확실히 가치 있는 일이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다만 경제적 불확실성이 급증하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매주 임장을 다니는 것이 올바른 투자방법인지는 의심해볼 만하다. 누군가 말했듯 '아무것도 하지 않는 투자'가 최선인 시기도 있기 마련이다(투자에 젬병인 내가 섣부르게 할 말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임장이 아무런 경제적 가치를 주지 못하는 테니스 동호회보다 더 나은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다.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는데 그가 "참 열심히 산다"고 한 마디 하는 걸 보니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주말 테니스클럽에 나가는 사람을 두고 "열심히 산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임장에 대해선 정확히 그 반대다.

그렇다면 도대체 '열심히 산다'는 건 무얼 가리키는 말인가. 언젠가 인간극장류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국 귀화 독일인이 이렇게 말한 걸 기억한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열심히 산다는 말이 나는 너무 어색하다. 열심히 일한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열심히 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독일인이 이해하지 못한 '열심히 산다'는 말의 의미는 일상에서 빈틈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특히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 한국인들이 비경제적인 것, 비생산적인 것에 어떠한 노력과 비용도 들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뗄 수 없다.

그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거나 미술관에 가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열심히 산다'는 것과 관계없는 일이다. 한국의 중장년들에게 DNA처럼 새겨져 있는 방학계획표를 잠시 떠올려보자.

우리는 모두 하루를 동그란 원 안에 욱여넣어 본 경험이 있다. 아침 7시반 기상·맨손체조, 8시 아침식사, 9시 '바른 생활', 10시 휴식(꼭 휴식시간이 정해져 있다), 정오 점심식사, 오후 1시 '슬기로운 생활', 오후 2시 학원 (중략) 저녁식사 후 밤 9시 취침. 아마 단 하루도 이렇게 살았을 것 같지 않은 우리는 슬기롭고 바른 생활을 한 어린이를 통과해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없다면 이건 어떤가. 25세 대학졸업, 26세 취직, 30세 연봉 5000만원 이상 기업 이직, 32세 결혼, 35세 2세 출생(생략할 수 있음), 38세 수도권 24평 아파트 마련, 45세 서울 32평 아파트 장만, 50세 은퇴 준비하기. 24시간을 방학계획표에 맞춰 일상을 구겨넣는 것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바른 생활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1년, 10년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떤 초조함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금 경제적인 것들에 너무 경도된 한국인들에게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삶이 아니라 약간은 긴장을 늦추는 일상, 허투루 보내는 시간들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1월을 맞은 우리는 매년 반복하던 새해계획을 한 번쯤 새롭게 돌아볼 일이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쓸모없는 것들로 계획을 다시 짜보는 것이다. 1주일에 두 번 이상 테니스를 치겠다든지, 음악·미술 등 예능활동을 새롭게 하겠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올해엔 살을 빼지도 찌지도 말고 그저 지금의 몸무게에 맞춰 느긋하게 1년을 보내겠다든지 하는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은 계획들 말이다.

양지훈 변호사(위벤처스 준법감시인)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