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박정희 대사를?… 영화 ‘노량’을 보고 놀란 이유 [유석재의 돌발史전]

유석재 기자 2024. 1.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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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 열도 끝까지 쫓아가 항복 받아내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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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량:죽음의 바다' 의 이순신(김윤석). /롯데엔터테인먼트

“나는 괜찮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다가 이 대사에서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순신이 마지막에 전사한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전혀 스포일러가 아니었고, 과연 그 최후를 어떻게 묘사할지가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첫 총격을 당했던(정확히 말해서 이 총격에 맞지는 않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순신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사를 했습니다.

영화는 이순신이 그 직후 다른 총탄에 맞아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두 번쨰 총격을 받아 절명한 사람이 첫 번째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남긴 말이 저랬다고? 이 말은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허구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이 설정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단순히 ‘나는 괜찮다’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총격을 두 번 당해 두 번째 총을 맞고 별세한 사람이 첫 번째 공격을 당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은 박정희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총이 고장나 김재규가 밖으로 나간 사이 옆에 앉았던 신재순과 심수봉이 다가와 “각하 괜찮으세요?”라고 묻자 이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나는 괜찮아.”

그 자리에 있었던 김계원과 신재순은 이것을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이나 어서 피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1979년 11월 7일 10.26사태 현장 검증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을 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두 번째로 총을 쏘는 순간을 재연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눈을 감고 정좌한 상태에서 두 번째 총격을 맞은 박정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이렇게 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총구 앞에서, 그리고 가슴을 관통당하고서, 또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다가오는 제2탄을 기다리면서 박정희가 보여 준 행동은 세계 암살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초인적인 모습이었다. …가슴을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은 박정희가 어떻게 그 고통을 누르고 ‘난 괜찮아……’라고 할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는다.”(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런데 영화 ‘노량’은 왜 이런 설정을 넣었을까요?

그 답은 ‘나는 괜찮다’ 이후 이어진 이순신의 대사에 있습니다. 이 대사 역시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렇게 끝내서는 아니 된다. 저들을 이대로 살려보낼 수 없다. 반드시 열도 끝까지 쫓아가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

…뭐, 뭐라고?

이 대사는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나오는 쿠키 영상에서, 이순신의 부하들이 세자 광해군에게 보고하는 장면에서 한번 더 그대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이 대사에 감독이 방점을 찍었다는 말이 될 것인데요. 영화 속 이순신은 절명 직전에도 “이 전쟁을 이렇게 끝내서는 안돼!”라고 절규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조선에서 철병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을 보여주며 ‘어차피 전쟁은 끝나는데 이순신은 왜 마지막 전투를 고집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명 제독 진린은 “자기네 임금도 좋아하지 않을 텐데 왜 저러지?”라며 의아해 합니다. 관객 역시 궁금증을 갖게 되죠. 그 의문이 ‘첫 번째 총탄을 맞지 않은 이순신의 대사’가 풀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 맥락을 모르는 관객이나 외국인이 본다면 이런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전쟁광이었나?”

영화 '노량' 스틸컷. /빅스톤픽쳐스

왜냐하면 이 장면 직전 계속된 전투 신을 보여주던 영화의 흐름이 갑자기 늘어지면서 이순신이 원균과 이억기, 정운, 어영담 같은 이미 전사한 동료와 부하들의 환영을 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왜군에게 살해당한 아들 이면의 환영도 영화 초반부터 계속 등장합니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복수를 위해 불필요한 전투에 집착하던 이순신이 정신이 혼미해진 채 죽었다’고 느낄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열도 끝까지 쫓아가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노량해전의 목적이 사실은 일본까지 추격해서 왜군의 항복을 받으려는 큰 그림이었다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당시 1만명도 되지 않았던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으로는, 더구나 명군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일본까지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에서 적과 싸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철저히 전략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이 철군한다고 해도 언제든지 재침략해 올 수 있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과 평화 유지 정책을 세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퇴각 전에 반드시 바다에서 섬멸해 최대한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이순신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성공했습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 프로덕션 스틸

350척이 넘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선은 노량해전으로 300여 척이 침몰되거나 나포됐습니다. 시마즈의 전함 중 살아남아 돌아간 것은 고작 50척. 이렇게 병력 대부분을 잃은 상태에서 불과 2년 뒤 일본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는 반(反) 도쿠가와 세력인 서군의 주요 장수로 참전했지만 완패했습니다. 만약 시마즈가 노량해전에서 병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노량해전은 일본군의 재침략을 막는 데 기여한 전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순신의 노량해전은 목적 달성을 훌륭히 성공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일본이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지 싸움을 멈추면 안된다’는 극단적 반일(反日)이 마치 이순신의 지론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진린의 대사를 통해 선조를 ‘파렴치하다’고 그린 반면, 실제로 패륜아였던 세자는 마치 이순신의 유지를 받든 현명한 군주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이 이해하기 힘든 역사관 속에서 이순신은 대단히 오래 북을 칩니다. 북을 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입니다. ‘선조실록’에 ‘이순신이 죽은 뒤 부하 손문욱이 옷으로 시신을 가리고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 공격했다’는 이덕형의 보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북 소리가 났기 때문에 이순신이 죽지 않다고 여겼다는 것은 이순신이 죽기 전에 북을 치고 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영화에서 이 장면이 지나치게 길게 이어지면서 ‘음파 공격’으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까지 몰고 간다는 점입니다.

영화 '노량' 스틸컷. /빅스톤픽쳐스

영화는 물론 실제 역사적 사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순신 아들 이면의 죽음, 노량해전의 원인인 순천 왜교성 전투, 왜군과 진린의 타협, 진린이 이순신을 칼로 위협했는데도 이순신이 굴하지 않는 장면, ‘이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이순신의 마지막 다짐, 노량에서 길목을 막고 관음포로 몰아넣은 이순신의 전략, 이순신의 죽음을 알게 된 진린의 오열과 백성들의 통곡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 신이 시작된 뒤 황당한 장면이 속출했습니다. 깜짝 등장한 거북선 2척을 보고 일본군이 놀라지만 곧 조선군에게서 노획한 화포를 쏘는데, 화포를 맞은 거북선이 모두 침몰합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칠천량 해전 이후에 조선 수군은 거북선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긴 합니다만,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에게 물어 보니 정조 때 ‘승정원일기’, 민인백의 ‘태천집’, 한원진의 ‘남당문집’ 등에 노량해전에 거북선이 출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해전사 전문가인 이민웅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명량해전 이후 1년 이상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거북선을 건조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집니다. 일본군이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화포를 쏜 사실은 있지만 이것은 1592년 부산포 해전 때 육상에서 조선 수군에게 쏜 것처럼 일본 육군이 사용한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임진왜란 내내 일본 수군은 해전에서 화포를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전작 ‘한산’에서도 이런 묘사가 나왔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영화 '노량'의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빅스톤픽쳐스

더구나 거북선이 노량해전에서 ‘침몰했다’? 한·중·일 그 어디에도 이런 기록은 없습니다. 조선 측 기록에 노량해전에서 침몰한 아군 전함은 ‘0′입니다. 시마즈 측 기록에는 4척을 침몰시켰다고 나오지만, 만약 거북선 같은 주력 전함이었다면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4척 침몰이 사실이라 해도 이것은 공격용 전함이 아닌 방패선이나 협선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영화에서 거북선은 늘 고초를 겪는 것 같습니다. ‘명량’에선 탈영병에 의해 불타고, ‘한산’에선 목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변신 로봇처럼 묘사되더니, ‘노량’에선 아예 시마즈가 쏜 화포에 의해 침몰해 버리니 말입니다.

왜 이런 묘사가 영화 속에 등장한 걸까요. 실제로 일본군이 유인책에 쉽게 말려들었는데도 좀처럼 말려들지 않았던 것처럼 묘사한 전작 ‘한산’과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실제 역사대로 재현하면 일본군의 일방적 패전이기 때문에, 영화의 극적 긴장감(쉽게 말해 재미)을 살리기 위해 일본군의 무용(武勇)을 오히려 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 속 고니시 유키나가의 행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는 진린과 타협해 시마즈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는데, 이순신은 서쪽의 고니시 대신 동쪽의 시마즈를 급습합니다. 자칫 동서 협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순신이 왜 그랬는지는 아직까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이순신은 고니시의 전력 자체를 무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고니시는 이순신이 노량으로 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협공 같은 건 포기하고 신속하게 도주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고니시가 협공을 하러 출전했다가 시마즈에게 보냈던 부하의 시체를 보고 되돌아간 것으로 나옵니다. 역시 극적 재미를 위한 설정으로 보입니다.

영화 '노량' 스틸컷. /빅스톤픽쳐스

이런 부분은 또 있습니다. 전작 ‘명량’에서부터 지적된 내용인데, 조선군과 일본군이 배 위에서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이 ‘노량’에서 너무나 길게 나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이민웅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등선 육박전’은 일본 수군이 쓴 전술이었고, 조선 수군은 총통을 쏴 적선을 깨뜨리는 ‘당파(撞破) 전술’을 썼습니다.” 일본군이 우리 배에 올라왔다면 이미 적의 전술에 넘어간 셈인데, 노량해전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당파 전술’이 배 자체를 충돌시키는 전술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대포 공격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노량해전 때 일부 백병전이 이뤄졌다는 근거 자료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노승석 소장에게 확인해 보니 이 자료였습니다. 신흠의 ‘상촌집’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적이 이를 보고 몰려와 각 배를 포위하자 배 위의 군사가 칼과 창으로 마구 휘둘러 내리치니 적의 죽은 자는 부지기수였다(賊見之坌集, 各船圍之, 船上人亂用刀槍下斫之, 賊死者不知其數).” 그런데 이것을 다시 읽어보니 아무리 봐도 배 위에서 백병전이 이뤄졌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본군이 우리 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즉 조선 수군은 적의 백병전 전술에 말려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 전술을 잘 몰랐던 명나라 수군은 실제로 일본군의 백병전에 당했고, 명나라 장수 등자룡이 전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장 시마즈가 배에 올라 직접 등자룡의 목을 베고, 진린이 자기 배를 버리고 이순신의 배에 올라 구출되는 장면은, 아 이것 참, 좀 황당합니다. 시마즈를 ‘무서운 놈’으로, 진린을 ‘멍청한 놈’으로 묘사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홍보물이 게시돼 있다. /뉴시스

처음에 기세 좋게 흥행 실적을 올리던 영화 ‘노량’은 새해 들어 매우 주춤하고 있습니다. 4일엔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에 밀려 박스오피스 1위에서 밀려났고, 일일 관객은 5만명대로 내려갔습니다. 연합뉴스는 ‘관객 수가 꾸준히 줄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4일 현재 누적 관객 수는 385만 명으로 손익분기점인 720만명까지 한참 남은 상태입니다. 만약 지금의 일일 관객 수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67일을 더 영화관에 걸려 있어야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흥행을 제쳐놓고서라도 사람들의 화제에조차 좀처럼 오르지 않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건지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①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켜 재침략을 막으려 했던 노량해전의 진짜 의미 대신, 이순신의 복수심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이순신이 강박증 환자이자 전쟁광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연출을 넣었다.

②그러다 보니 엉뚱한 설정(거북선 침몰, 백병전, 고니시의 협공, 시마즈의 무용)들이 등장했고, 마지막 장면이 대단히 늘어졌다.

그래서…

③지루했다.

다만, ‘열도 끝까지 쫓아가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대사를 삽입하기 위해 이순신이 두 번 총격을 당했고 첫 번째 총탄은 맞지 않는 것으로 설정을 한 것까지는 알겠지만, 도대체 왜 박정희가 남긴 마지막 말이 이순신의 대사로 나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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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가 게재된 뒤 영화 ‘노량’의 제작사인 빅스톤픽쳐스 측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대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전혀 관련성이 없다’는 입장을 알려왔습니다. 감독과 제작사는 영화 속 이순신 장군의 ‘나는 괜찮다’라는 대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했다는 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기자의 황당한 개인적 상상력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첫 번째 탄환은 이순신 장군에게 맞지 않고 북채에 맞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분명히 밝혀 이 부분은 본문에서도 수정했습니다.

제작사는 또한 “영화 ‘노량’은 이순신 장군의 유지를 해석함에 있어 일본의 재침략을 막고자 했다는 해석도 중요하지만 제작사는 도리어 그것을 넘어서서 이순신 장군의 진정한 유지가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하고 해석했으며 그것은 ‘적에게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어야 한다’는 대사와 맞닿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사가 ‘일본이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지 싸움을 멈추면 안된다’라는 표현으로 반일선동의 의미는 아니며, 장군께서 생각하신 전쟁의 진정한 종결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해서 현재의 우리가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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